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계약의 무효와 취소 - 사기·강박에 의한 의사표시

칼린츠 2020. 10. 31.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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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받은 아파트 옆에 공동묘지가 있더라...

 

10년차 직장인 A씨. 그는 아파트 분양계약을 맺었다. 드디어 내 집이 생기다니! 분양회사는 아파트 근처에 여러 편의시설이 있다고 광고했다.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입주하고 알게 됐다. 편의시설은 개뿔. 오히려 근처에는 커다란 공동묘지가 있었다. A가 상상했던 집은 이런 곳이 아니었다. 그는 분양계약을 취소하고 싶다. 취소할 수 있을까?

 

민법 제110조는 말한다. 누구든지 사기나 강박을 당해 의사표시를 했다면 취소할 수 있다고. 지금까지 비진의표시, 통정허위표시, 착오를 공부했다. 모두 의사와 표시가 다른 경우였다. 반면, 사기나 강박을 당한 경우는 다르다. 당신이 사기나 강박을 당해 "돈을 증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하자. 이때 실제로 돈을 주겠다는 효과의사는 있다. 의사와 표시가 같다. 다만 그 의사표시 형성과정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를 '하자 있는 의사표시'라고도 부른다. 

 

제110조(사기,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 ①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 
②상대방있는 의사표시에 관하여 제삼자가 사기나 강박을 행한 경우에는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에 한하여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 
③전2항의 의사표시의 취소는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사기나 강박은 위법하다. ① 사기를 쳐서 재산상 이익을 얻거나 협박을 한 사람은 형사처벌받는다.[각주:1] ② 또, 사기나 강박은 위법한 행위이므로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다면 민사상 불법행위가 성립한다. 피해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각주:2] ③ 여기에 더해 민법은 사기나 강박을 당해 의사표시를 한 사람은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게 했다. 자유의사로 의사표시를 한 것이 아니니까 그 효력을 부정할 수 있게 했다. 

 

 

 

사기와 강박이란?

 

사기는 남을 속여 의사표시를 하게 만드는 행위다. 일반 거래행위에서 사기인지 문제되는 대표적 사례가 허위 과장 광고다. 상품을 팔 때 다소 과장하거나 허위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렇지만 거래상 중요한 사항에 관해 구체적 사실을 신의칙에 비추어 비난받을 방법으로 허위고지하면 사기가 된다.

 

  • 가령 대법원은 "상품의 선전, 광고에 있어 다소의 과장이나 허위가 수반되는 것은 그것이 일반 상거래의 관행과 신의칙에 비추어 시인될 수 있는 한 기망성이 결여된다고 하겠으나, 거래에 있어서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 구체적 사실을 신의성실의 의무에 비추어 비난받을 정도의 방법으로 허위로 고지한 경우에는 기망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 B는 백화점에 입점된 의류회사 운영자다. 그는 옷을 정상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음에도 기존 가격을 실제보다 높게 표시하여 마치 할인판매하는 것처럼 꾸몄다. 대법원은 대형백화점의 이러한 '변칙세일'은 기망행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각주:3]
  • 반면, C는 상가를 분양한 자다. 그는 "상가에 첨단 오락타운을 조성하고 전문경영인을 두어 위탁경영을 맡기겠다. 이로써 일정수익을 보장하겠다."는 광고를 했다. 이 광고 내용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 사안에서 대법원은 이 정도 허위·과장 광고는 일반 상거래 관행과 신의칙에 비추어 봤을 때 기망성이 결여된다고 했다. 특히, 용도가 특정된 특수시설을 분양받을 경우 그 운영을 어떻게 하고 수익은 얼마나 될 것인지와 같은 사항은 투자자들의 책임과 판단하에 결정해야 할 문제로 봤다.[각주:4]

 

사기꾼들은 말이 많다. 달콤한 혀는 상대방을 혹하게 한다. 그러나 진짜 고수는 주저리 떠들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남을 속일 수 있다. 이른바 '부작위'에 의한 사기다.

 

D는 아파트 분양자다. 그는 분양계약자들에게 아파트 단지 인근에 쓰레기 매립장이 건설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법원은 "거래상대방에게 일정한 사정을 고지하였다면 그 상대방이 거래하지 않았을 것임이 경험칙상 명백한 경우에는 그 사정을 고지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각주:5] 그래서 분양계약자들에게 쓰레기 매립장 건설 예정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기망에 해당한다고 했다. D는 가만히 있었지만 알려야 할 것을 알리지 않았기에 사기가 되는 것이다. 분양계약자는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강박이란 다른 말로 협박이다. 어떤 해악을 알려주고, 상대방을 겁먹게 만들어 그 공포심으로 의사표시를 하게 만드는 행위다. "나에게 이 물건을 안 팔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강박을 받아서 의사표시를 한 사람도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다만 강박의 정도가 매우 심할 때가 있다. 강박으로 피해자가 단순히 공포를 느끼는 정도를 넘어, 의사결정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태에 이른 경우다. 대법원은 이 정도면 아예 의사표시를 무효로 본다. 의사표시는 의사+표시인데, 이때는 실질적으로 의사표시에 조응하는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의사 없이 그저 의사표시처럼 보이는 행위를 하였을 뿐이다. 

 

그치만 대법원이 강박의 정도가 심해 의사표시를 무효로 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① E는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권력을 잡던 시기에 불법연행·구금되었다. 이 상태에서 자기 소유 부동산을 대한민국에 증여한다는 의사표시를 했다.[각주:6] ② F는 상대방이 5일 동안 같이 기거하며 폭행과 협박을 하길래 그 시달림에 지쳐 부동산을 증여한다는 의사표시를 했다.[각주:7] 위 사례들에서 대법원은 E와 F의 의사결정의 자유가 박탈된 상태는 아니고, 제한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의사표시가 무효는 아니라고 했다. 

 

이처럼 대법원 입장에 따르면 강박으로 의사표시가 무효로 되기는 대단히 어렵다. 아마 상대방이 당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부동산을 안주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하고, 당신이 그런 상황에서 피치 못하게 증여한다는 의사표시를 해야만 무효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제3자의 사기·강박

 

A는 B에게 사기 당해 "부동산을 증여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A는 불쌍한 놈, B는 나쁜 놈이다. 그래서 민법 제110조 제1항은 별다른 조건없이 A가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A가 B에게 사기 당한 것이 아니라, 엉뚱한 제3자 C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해보자. A는 C의 꼬드김에 넘어가 B에게 부동산을 증여했다. 이제 나쁜 놈은 B가 아니라 C이다. B는 그냥 선량한 사람이다. 그는 준다고 해서 받았을 뿐이다. A가 마음대로 부동산 증여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면 B는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는다. 

 

 

그래서 민법은 제3자가 사기·강박을 한 경우에는 취소 요건을 다르게 규정한다. 제110조 제1항과 제2항을 비교해보자.  의사표시의 상대방이 사기·강박을 했다면 무조건 취소할 수 있다(제110조 제1항). 반면 제3자가 했다면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어야만 취소할 수 있다(제110조 제2항). C가 기망했다는 것을 B가 알았거나 알 수 있었어야만 A는 증여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상대방인 B의 주관적 사정에 따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셈이다. 

 

이처럼 사기를 치거나 강방을 한 사람이 의사표시의 상대방인지, 제3자인지는 중요하다. 취소의 요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의사표시 상대방만이 아니라, 그 상대방과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이 사기·강박을 한 경우에도 민법 제110조 제1항에 따라 곧장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각주:8] 

 

※ 대법원 1998.01.23. 선고 96다41496 판결
의사표시의 상대방이 아닌 자로서 기망행위를 하였으나 민법 제110조 제2항에서 정한 제3자에 해당되지 아니한다고 볼 수 있는 자란 그 의사표시에 관한 상대방의 대리인 등 상대방과 동일시할 수 있는 자만을 의미하고, 단순히 상대방의 피용자이거나 상대방이 사용자책임을 져야 할 관계에 있는 피용자에 지나지 않는 자는 상대방과 동일시할 수는 없어 이 규정에서 말하는 제3자에 해당한다. 

 

위 판례에서 보듯이, 대법원은 상대방의 대리인은 상대방과 동일시 할 수 있는 자이어서 제110조 제2항의 제3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제110조 제1항을 적용해야 한다. 대리인이 기망행위를 하였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았든 몰랐든, 피해자는 곧장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 대리인의 행위는 본인을 대체하므로 타당한 내용이다.[각주:9]

 

만약 상대방의 피용자가 기망행위를 하였으면 어떨까? 

 

위 대법원 1998.01.23. 선고 96다41496 판결의 사실관계는 이렇다. 1994년도 쯤이었다. G는 상호신용금고 기획감사실 과장이 '지급보증해준다'는 말에 속아 상호신용금고에 근저당권을 설정해주고, 4억 5천만원 대출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기획감사실 과장은 처음부터 그 대출금을 편취할 의도였다. 대출금이 나오자 공범자에게 그 돈을 전달했다.

 

G는 상호신용금고와 맺은 근저당권설정계약을 취소하고 그 근저당권설정등기말소를 청구했다. 상호신용금고 기획감사실 과장은 상호신용금고 직원이므로 상호신용금고와 동일시할 수 있고, 자기는 민법 제110조 제1항에 따라 근저당권설정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피용자에 지나지 않는 자는 상대방과 동일시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G는 상대방이 아닌 제3자에게 사기당하여 의사표시를 한 것이 된다. 상호신용금고가 기획감사실 과장이 기망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어야만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제110조 제2항).

 

대법원은 이 상호신용금고의 직원이 50명에 못 미치는 작은 규모라는 점에서 과장이 사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거에 과실이 있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G는 근저당권설정계약을 취소할 수 있었다.[각주:10]

  1. 형법 제347조, 제283조, 제350조 [본문으로]
  2. 제750조(불법행위의 내용)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본문으로]
  3. 대법원 1993. 8. 13. 선고 92다52665 판결 [본문으로]
  4. 대법원 2001.05.29. 선고 99다55601, 55618 판결 [본문으로]
  5. 대법원 2006. 10. 12. 선고 2004다48515 판결 [본문으로]
  6. 대법원 2002. 12. 10. 선고 2002다56031 판결 [본문으로]
  7. 대법원 1984. 12. 11. 선고 84다카1402 판결 [본문으로]
  8. 대법원 1998. 1. 23. 선고 96다41496 판결 [본문으로]
  9. 민법 제114조 제1항, 제116조 제1항 참조 [본문으로]
  10. 반면, 대법원 1999. 2. 23. 선고 98다60828·60835 판결은 은행을 소비대주로 하는 소비대차에서 은행의 출장소장은 은행에 대하여 제3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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