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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입문:계약법] 계약의 무효와 취소 - 허위표시

칼린츠 2020. 8. 22.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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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조(통정한 허위의 의사표시) ①상대방과 통정한 허위의 의사표시는 무효로 한다. ②전항의 의사표시의 무효는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허위표시는 무효다. 

 

A는 사업에 실패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강제집행이 임박했다. 가만히 있다간 살고 있는 집마저 날아갈 것 같다. 집이라도 빼돌려야겠다. A는 친구에게 부탁했다. 둘은 가짜로 "A의 집을 친구에게 매도한다"는 매매계약서를 작성했다. 이 계약은 유효할까?

 

이렇게 상대방과 짜고 가짜로 의사표시를 만들어 내는 것을 통정허위표시라 한다. 비진의표시는 진의 아닌 의사를 표시한 거다. 허위표시는 단지 진의 아닌 의사를 표시하는 걸 넘어, 상대방과 합의(통정)까지 했다는 점이 다르다. 

 

허위표시를 한 사람들을 특별히 보호할 필요는 없다. 허위표시는 무효다(제108조 제1항). A와 친구가 맺은 가짜 매매계약도 무효다. A는 그 매매계약을 이행할 필요가 없고, 이미 이행한 것이 있으면 반환청구할 수 있다(제741조). 

 

혹시 가장 매매계약에 따라 재산을 넘긴 경우 제746조의 불법원인급여가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불법원인급여란 재산을 준 원인이 불법적 내용의 계약인 때를 말한다. A와 친구가 맺은 계약 내용이 불법적인 건 아니다. 그저 'A의 집을 친구에게 판다'는 내용의 가짜 계약일 뿐이다. 불법원인급여는 아니다. A가 계약에 따라 집을 넘겨줬더라도 되돌려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각주:1]

 

허위표시 상자 안에 다른 의사표시를 숨겨놓는 경우가 있다. 가령 B는 아들에게 부동산을 증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증여세가 너무 아까웠다. 꾀를 냈다. 둘은 실제로 증여계약을 맺은 것이지만, 허위로 매매계약서를 썼다. 이때 두 사람이 가짜로 만든 매매계약은 허위표시라서 무효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증여를 한다"는 의사는 진짜다. 이것만큼은 진정한 합의다. 그러므로 매매계약은 무효이지만, 그 안에 담긴 증여계약은 유효다. 여기서 허위표시에 숨은 증여계약을 은닉행위라고 한다. 가장행위(허위표시)가 무효라도 은닉행위는 유효하다.

 

 

허위표시의 무효는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허위표시는 무효지만, 누구라도 그 무효를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각주:2] 제3자에게는 그냥 표시된 대로 효력이 생긴다. 뭔 소린가 싶지?

 

앞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A는 '친구에게 집을 매도한다'는 계약을 가짜로 체결했다. 이 매매계약은 무효다. 그 친구가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치더라도 그 집을 취득하지 못하고, 그 집을 제3자 C에게 매도하더라도 C가 집을 취득하지 못한다. 그 친구가 소유권이 없으니, C도 그한테서 소유권을 넘겨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108조 제2항이 있다. 마침 C는 A와 그 친구가 맺은 매매계약이 가짜라는 걸 몰랐다. C에게는 '이 매매계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대항하지 못한다. C에게만큼은 그 계약이 유효하다. C는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다. 이처럼 제108조 제2항은 C와 같은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는 규정이다. 

 

 

모든 제3자를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제108조 제2항은 허위표시라는 포장박스가 진짜인 걸로 믿고 이해관계를 맺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 허위표시랑은 상관없이 예전부터 이해관계를 맺은 사람은 특별히 제108조 제2항으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 대법원은 이 점을 “제108조 제2항의 제3자란 허위표시로 외형상 형성된 법률관계를 토대로 실질적으로 새로운 법률상 이해관계를 맺은 자를 의미한다”는 멋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각주:3]
 

그래서 C가 가장매매라는 걸 모르고 A의 친구에게서 부동산을 매수한 경우만이 아니라, 그 부동산에 저당권 설정등기를 하거나 가등기를 설정한 경우에도 제108조 제2항으로 보호받는다. 만약 누군가 가장매매계약을 체결했고, D가 그 매매계약이 가짜라는 걸 모르고 매수인에게서 매매대금채권을 양수한 경우 D도 제108조 제2항의 제3자다.[각주:4] 가짜 매매라는 외형상 형성된 법률관계를 토대로 그 채권을 양수함으로써 새로운 법률상 이해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사람이 채권을 허위로 양도한 경우 채무자는 제108조 제2항의 제3자가 아니다. 가령 E는 채권자에게 5천만 원을 줘야할 채무가 있다. 그런데 그 채권자가 다른 사람 F에게 그 5천만 원 채권을 허위로 양도했다. 그럼에도 그 채권자는 E에게 "내가 채권을 양도한 것은 가짜고, 내가 진짜 채권자다. 나한테 5천만 원을 갚아라"라고 청구했다. E는 "나는 제108조 제2항의 제3자다. 채권양도가 허위라는 건 내게 대항할 수 없다. 나는 당신이 아니라 채권 양수인에게 돈을 주련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E가 제108조 제2항이 말하는 선의의 제3자가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E는 채권자가 채권을 가짜로 양도하기 전부터 쭉 이해관계를 맺고 있던 자다. 채권양도를 진짜라 믿고 이해관계를 맺은 사람이 아니다. E는 제108조 제2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E는 채권자에게 5천만 원을 줘야 한다. [각주:5]

 

 

  1. 대법원 1994. 4. 15. 선고 93다61307 판결은 "불법원인급여를 규정한 민법 제746조 소정의 "불법의 원인"이라 함은 재산을 급여한 원인이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으로서,강제집행을 면할 목적으로 부동산의 소유자명의를 신탁하는것이 위와 같은 불법원인급여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본문으로]
  2. 제108조 제2항 [본문으로]
  3. 대법원 1996. 4. 26. 선고 94다12074 판결 [본문으로]
  4. 대법원 2004. 5. 28. 선고 2003다70041 판결 [본문으로]
  5. 대법원 1983. 1. 18. 선고 82다594 판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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