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잡글 8

변호사의 글쓰기

실장님이랑 밥먹다가 들은 이야기다. 거래처 직원이 실장님에게 이런 말을 하더란다. 그 직원이 법원에서 변론하고 있는 나를 봤단다. 얼굴이 얌전했단다. 그런데 조곤조곤 할말은 다 하더란다. 그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칭찬을 받은 것 같아 뿌듯했다. 칭찬은 받았지만, 사실 나는 말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어쩔 수 없어서 말하는 거다. 법원에서도 꼭 필요한 말만한다. 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 같은 말, 그런 말만 한다. (사실, 판사들도 바빠서 당사자들의 말을 듣기 귀찮아 하는데, 그 얼굴에 대고 길게 말하는 것도 고역이다.) 만약 변호사가 말하는 직업이었다면 나는 금방 때려쳤을 거다. 다행히도 한국은 구술변론이 발달하지 않았다. 공방은 거의 모두 서면으로 이루어진다. 미드에서 나오는 변호사는 멋지다. ..

잡글 2020.04.04

나는 오늘도 야근을 한다.

취직 이후 내 삶은 야근과 주말근무로 채워졌다. 2년 반을 이렇게 살았다. 변론기일이 다가온다. 보정기일이 다가온다. 서면을 제출한다. 신청서를 작성한다. 기일 하나를 처리하면 다음 기일이 다가온다. 변호사의 주적(主敵)은 상대방이 아니라 마감기한이다. 그동안 내가 거쳐온 마감기일은 얼마나 될까. 나는 오늘도 밤늦게 사무실 내 방을 지킨다. 커서가 깜빡인다. 이것은 신호등으로 따지면 직진 신호다. 이 신호에 맞추어 나는 손가락을 움직인다. 글을 토하고 토해낸다. 음식물을 모두 게워내면 위산이 쏟아지듯이, 내 몸에서 논리를 쭉 토해내고 나면 뇌수마저 쏟아지는 기분이 든다. 위산마저 비워버리면 더 이상 토하기를 멈추듯이, 지면에 모든 단어를 토해놓고 나면 내 글쓰기도 끝난다. 방랑 검객이 지켜야할 것은 자기..

잡글 2020.01.31

[독서일기]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김남주 옮김)

1. 줄거리(스포있음) 헤일셤은 외부와 차단된 기숙학교다. 이곳을 다니는 캐시, 루스, 토미가 주인공이다. 얼핏보면 평범한 학교에서 평범한 학생들의 평범한 일상인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어휘들이 등장한다. 기증, 간병사, 교환회... 학생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선생님들이 병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마담이라 불리는 알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나 우수한 학생 그림을 가져간다. 뭔가 수상쩍다. 일상 소설인 듯한데 드문드문 불길하다. 중간쯤 가면 전말이 드러난다. 헤일셤 학생들은 유전자 복제인간, 즉 클론이었다. 이들은 오직 장기기증을 위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헤일셤을 졸업하면 장기기증자가 된다. 장기를 몇차례 기증하고나면 몸이 쇠하여 죽는다. 더러는 장기기증을 시작하기 전에 간병인이 되는 ..

잡글 2018.07.29

[독서일기]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김정운)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책이다. 그는 나이 50이 되자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거야"라고 마음먹었단다. 그래서 교수직을 때려치고, 일본으로 갔다. 만화를 배우기 위해서다. 일본을 가서 자취하고, 그림그리며, 책도 쓰고, 번역도 하면서 살고 있단다. 정말 멋지다. 혼자 사는 게 외롭지만 대신 행복을 얻었다. 이 책에는 행복과 인생에 관한 그의 단상이 실려있다. 사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 엉엉. 그러나 읽다보니 외로움보다는 행복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느리지만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낸 삶에서 찾아오는 잔잔한 행복들 말이다. 비우니 도리어 채워지는 법이다. 아래는 뭔가 기억하고 싶은 대목이나, 읽다가 들었던 생각들이다. 간략하게 메모해본다. 1. 사실 성공은 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열심..

잡글 2018.07.15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맙소사. 내 눈으로 퍼스트 건담을 직접 보게 되다니. 3D 안경으로 보이는 건담은 무려 메카고지라와 싸우고 있었다. 마음이 도키메키했다. 감동의 눈물이 흐를 뻔 했다. 뿐만 아니다. 주인공이 백투더퓨쳐의 드로이안을 타고 레이싱을 한다. 그는 막타에 아도겐을 쓰기도 한다. 중간엔 샤이닝을 VR로 체험하기도 한다. 여캐는 아키라에 나오는 바이크를 타고 등장한다. 게임잡지로만 봤던 아타리 게임기가 나오기도 한다(이 게임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를 게임화한 E.T.라는 '불세출'의 망작을 남기고 골로가지 않았던가). 살짝 광전사가 걸어가는 장면도 나오고, 자세히 찾아보면 오버워치 트레이서도 나온다. 감동이다. 영화는 2045년의 미래시대를 다룬다. 그런데 이처럼 덕후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영화를 가득 ..

잡글 2018.04.22

[독서일기] HOW to READ MARX, Peter OSborne

1. 마르크스는 노동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구체적 노동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적 노동이다. 구체적 노동은 우리가 작업현장에서 볼 수 있는 현실적인 모습의 노동을 말한다. 추상적 노동은 그 구체적 노동에서 도출할 수 있는 노동의 보편적 단위다. 상품이란 어차피 노동으로 태어나는 것. 상품도 노동의 두가지 형태에 대응하여, 두가지 가치를 갖는다. 하나는 사용가치, 다른 하나는 교환가치다. 사용가치는 상품의 현실성, 물질성에서 비롯한다. 반면 교환가치는 상품의 사회적 속성에서 나온다. 2. 공산주의는 단지 사유재산을 폐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안에는 '사유재산이냐 아니냐'란 대립보다 더 근본적인 대립이 있다. 그것은 '노동 vs 자본'의 대립이다. 이 대립은 '살아있는 노동 vs 죽은 노동..

잡글 2018.01.07

[독서일기] 이방인, 까뮈 - 세 죽음과 실재계의 증명

은 세 죽음으로 구성된다. 어머니의 죽음, 해변가 살인, 뫼르소가 받은 사형선고. 세 개의 죽음을 거치며 주인공 뫼르소는 조금씩 변화한다. 먼저, 어머니의 죽음 단계다. 이 단계에서 뫼르소에게는 즉물적 감각만 살아있다. 그는 그저 자고, 먹고, 놀고, 섹스한다. 생리적 욕구만 있을 뿐, 사회적 욕망이 없다. 아직 상징계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하긴, 소설 내용을 떠올려보면 뫼르소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애초에 부친살해로 초자아를 형성할 기회가 없었다. 이 시점의 뫼르소는 상상계에 속하는 인물이다. 다음으로, 해변가 살인 단계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였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는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뫼르소에게는 최초의 금기가 생겼다. "가만히 있으세요(변호사)." 이후 뫼르소는 법조인들의 낯선..

잡글 2017.11.18

규범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이 규범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법실증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위 규범에서 하위 규범의 정당성이 나온다." 과연 그럴까? 역사를 돌이켜보자. 헌법이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헌법에서 하위 법률들이 태어나온 것이 아니다. 하위 법률에서 헌법이 연역된 것이다. 스멘트 같은 통합주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사회적 합의? 동화적 통합과정? 대체 그 사회적 합의가 "왜 사람을 죽여도 된다"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로 이루어졌단 말인가? 통합주의는 규범의 정당성에 대한 답이 되기에 부족하다. 최초로 누군가 누구를 찌른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는 울부짖는다. 불쌍하다. 가족들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다. 그것을..

잡글 2017.10.05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