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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김남주 옮김)

칼린츠 2018. 7. 29.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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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스포있음)

 

 

헤일셤은 외부와 차단된 기숙학교다. 이곳을 다니는 캐시, 루스, 토미가 주인공이다. 얼핏보면 평범한 학교에서 평범한 학생들의 평범한 일상인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어휘들이 등장한다. 기증, 간병사, 교환회... 학생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선생님들이 병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마담이라 불리는 알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나 우수한 학생 그림을 가져간다. 뭔가 수상쩍다. 일상 소설인 듯한데 드문드문 불길하다.

 

중간쯤 가면 전말이 드러난다. 헤일셤 학생들은 유전자 복제인간, 즉 클론이었다. 이들은 오직 장기기증을 위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헤일셤을 졸업하면 장기기증자가 된다. 장기를 몇차례 기증하고나면 몸이 쇠하여 죽는다. 더러는 장기기증을 시작하기 전에 간병인이 되는 클론도 있다. 간병인은 장기기증자를 간호하는 일을 맡는다. 아마 인간이 직접 클론을 간병하면 꺼림칙한 감정을 느낄 게다. 그 죄책감을 피하려고 간병마저 클론에게 맡기는 것 같다. 어쨌든 간병인이 된 클론도 간병 일이 끝나면 장기기증자가 된다. 결국 모든 클론은 장기기증자가 되어 곧 죽을 운명을 맞이한다.

 

클론 입장에서는 자신의 운명이 억울할만하다. 헐리웃 영화였다면 터미네이터가 등장했을 거다. 클론이 빡쳐서 수백번 들고 일어날 법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매우 순종적이다. 먼저 루스가 기증을 마치고 죽는다. 루스는 죽기전에 자신의 베프인 캐시와 남자친구인 토미에게 말한다. 둘이 사랑을 이어가라고. 루시가 죽은 뒤 캐시는 토미의 간병인이 된다. 그러나 토미마저 장기기증을 마치고 죽는다. 캐시는 홀로 남는다.

 

노퍼크란 지역에는 전설이 있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물건들이 바로 이곳, 노퍼크에 모인다는 것이다. 캐시는 그런 노퍼크에 있다. 그곳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이 떠밀려오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떠나보낸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린다.

 

 

2. 느낀점

 

 

쓸쓸함이 지배하는 소설이다. 그 쓸쓸함에 취해 끝까지 읽게 된다.

 

SF소설이다. 그러나 작가는 SF적 배경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 어떤 과학적 원리로 헤일셤 아이들이 태어났는지, 장기기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장기기증 수술과정에 잔인한 내용은 없는지와 같은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클론을 죽일거면 그냥 죽이지, 헤일셤과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이런 물음도 가능하겠지만, 이 소설은 이런 논점들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작가는 이런 논쟁을 단 몇 장만으로 처리한다.

 

이 작품이 다루려는 내용은 '복제인간이 몰고올 윤리적 딜레마' 따위가 아니다. 작가는 클론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어떤 존재가 처한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해 클론이란 SF적 설정을 살짝 차용했을 뿐이다. 클론은 기증으로 죽을 운명이다. 그런데 어디 짧은 세월을 살다갈 존재가 클론뿐이겠는가? 필멸은 모든 존재의 숙명이다. 클론의 이야기는 클론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공통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로써 클론의 이야기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일반적으로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상실의 영역이다. 미래는 앞으로 있을 희망과 꿈의 영역이다. 그러나 클론에게는 미래야말로 상실의 공간이다. 클론은 아이를 낳을 수도, 가족을 꾸릴 수도 없다. 미래에는 친구들이 죽는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도 예정되어 있다. 반면 과거는 치유의 공간이다. 캐시는 말한다. 어렸을 적 즐거웠던 장면만이 아니라, 괴로웠던 순간들도 지나고보니 모두 아름다운 기억이 되었다고. 그녀는 그 그리움을 달래려고 이미 폐교된 헤일셤을 찾으려고도 한다. 그러므로 <나를 보내지 마>의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주인공 캐시는 미래에서 입은 상처를 과거에서 치유받는다'고.

 

캐시는 과거에서 어떻게 치유받는가.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다. 사실 <나를 보내지 마>라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캐시가 기억을 더듬는 내용이다. 캐시는 기억하는 존재이다. 기억으로 친구들을, 추억들을 불러모은다. 기억은 단지 과거의 장면을 동영상 재생하듯이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작업이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파편화된 장면들이 있다. 기억은 인과적인 언어를 아교처럼 사용하여 그 파편들을 이어붙이는 일이다.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므로 각 장면마다 전후 맥락에 맞는 의미가 생긴다. 기억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캐시는 어렸을 적 일을 떠올리며 '그 의미가 밝혀진 것은 나중이었다'는 식의 코멘트를 자주 덧붙인다. 당시에는 상황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벌어진 일들과 연결지어 보며 그 의미를 새기는 것이다. 캐시는 어쩔 수 없이 소멸하는 존재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친구들끼리 술먹다가 90년대 노래 이야기를 했다. H.O.T.나 핑클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아 나도 늙긴 늙었구나. 눈물나게 반가웠다. 왜 이렇게 반가운 걸까? 기억은 과거를 반복하여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일이어서가 아닐까. 기억으로 과거는 현재와 연결된다. 현재는 미래와 연결된다. 기억하는 주체는 이를 통해 연속성을 갖는다. 그 연속성이 정체성을 형성한다. 기억하는 주체만이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 클론이 인간같아 보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클론은 과거를 기억한다. 단지 과거의 일을 기계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떠나보낸 친구들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며, 함께 한 일들에 의미를 찾는다. 클론 역시 기억하는 존재이기에 인간다운 정체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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