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변호사의 글쓰기

칼린츠 2020. 4. 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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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님이랑 밥먹다가 들은 이야기다. 거래처 직원이 실장님에게 이런 말을 하더란다. 그 직원이 법원에서 변론하고 있는 나를 봤단다. 얼굴이 얌전했단다. 그런데 조곤조곤 할말은 다 하더란다. 그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칭찬을 받은 것 같아 뿌듯했다. 

 

칭찬은 받았지만, 사실 나는 말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어쩔 수 없어서 말하는 거다. 법원에서도 꼭 필요한 말만한다. 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 같은 말, 그런 말만 한다. (사실, 판사들도 바빠서 당사자들의 말을 듣기 귀찮아 하는데, 그 얼굴에 대고 길게 말하는 것도 고역이다.)

 

만약 변호사가 말하는 직업이었다면 나는 금방 때려쳤을 거다. 다행히도 한국은 구술변론이 발달하지 않았다. 공방은 거의 모두 서면으로 이루어진다. 미드에서 나오는 변호사는 멋지다. 변호사가 일어나서 쏼라쏼라 말도 잘한다. 미국이 진짜 그렇게 재판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한국은 그렇게 진행 안한다. 한국에서 변호사가 일어나 돌아댕기면 감치 처분을 받을 수 있다;; 

 

그럼 한국 변호사는 노느냐? 그건 또 아니다. 법원에 오기 전에 미리 법원에 하고 싶은 말을 서면으로 써낸다. 그 서면을 써내기 위해 박터지게 공부한다. 머리를 쥐어가며 마지막 남은 아이디어 한방울까지 짜낸다. 서면에 담긴 나의 문장 하나하나마다 내 눈물과 야근이 담겨있다. 서면은 그렇게 겨우겨우 완성한다. 그리고 법정에 나가 말한다. "20XX. X. X.자 준비서면을 진술합니다"라고. 이로써 그동안 서면으로 써낸 말을 법원에서 전부 말한 것이 된다. 참 편하다.

 

법원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더라도, 이미 서면으로 충분히 싸우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변호사는 말하는 직업이 아니라, 글쓰는 직업이다. '말빨'보다 '글빨'이 중요하다. 법원에서 '어버버.. 어버버..' 거리더라도 걱정하지 말자. 판사한테 "정리해서 서면으로 제출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다음에, 집에 돌아와서 엄청나게 훌륭한 서면을 쓰는 거다. 이걸 '떠억'하고 법원에 제출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변호사의 삶은 단순하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변호사도 글쓰기 쳇바퀴를 돈다. 변론기일이 잡힌다. 쟁점에 대한 판례와 문헌을 찾아본다. 정리하여 서면을 작성한다. 법원에 제출한다. 새로운 변론기일이 잡히고, 같은 일이 반복된다. 어찌보면 대학생이랑 처지가 비슷하다. 레포트 제출기한이 잡힌다. 도서관에서 논문과 책을 찾아본다. 정리하여 내 글로 옮긴다. 레포트는 교수님이 평가했지만 준비서면은 판사님이 평가한다는 게 다를 뿐이다. 

 

하긴, 학교 다닐 때도 레포트 쓰는 걸 좋아했다. 우선 글쓰는 일 자체가 즐거웠다. 완성물을 보고나면 뿌듯하기도 했다. 그 성취감도 좋았다. 난 이제 변호사가 되었다. 만족한다. 매일 내 방에서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글쓰는 게 전부다. 아니, 이렇게 재밌는 일이!!! 그런데 돈도 주고, 방도 주다니!!! 토론하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면 법조인 생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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