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나는 오늘도 야근을 한다.

칼린츠 2020. 1. 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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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 이후 내 삶은 야근과 주말근무로 채워졌다. 2년 반을 이렇게 살았다. 변론기일이 다가온다. 보정기일이 다가온다. 서면을 제출한다. 신청서를 작성한다. 기일 하나를 처리하면 다음 기일이 다가온다. 변호사의 주적(主敵)은 상대방이 아니라 마감기한이다. 그동안 내가 거쳐온 마감기일은 얼마나 될까. 나는 오늘도 밤늦게 사무실 내 방을 지킨다.  


커서가 깜빡인다. 이것은 신호등으로 따지면 직진 신호다. 이 신호에 맞추어 나는 손가락을 움직인다. 글을 토하고 토해낸다. 음식물을 모두 게워내면 위산이 쏟아지듯이, 내 몸에서 논리를 쭉 토해내고 나면 뇌수마저 쏟아지는 기분이 든다. 위산마저 비워버리면 더 이상 토하기를 멈추듯이, 지면에 모든 단어를 토해놓고 나면 내 글쓰기도 끝난다. 

 

방랑 검객이 지켜야할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그저 지금 만난 상대를 이기기 위해 집중할 뿐이다. 변호사도 특별한 신념이 없다. 애석하게도 변호사는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없다. 원고가 아무리 불리해보여도, 내가 원고 측 변호사라면 원고를 옹호해야 한다. 허름한 장비로 구색을 맞추고 전쟁터 불구덩이 한복판에 뛰어들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입장은 이미 주어졌다. 변호사는 그 안에서 고군분투해야 한다.


판결은 쌓이고 쌓여 거대한 법리를 이루지만, 변호사는 그렇게 먼 훗날의 일엔 관심 없다. 그저 오늘 만난 내 앞의 적을 벨 뿐이다.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칠 뿐이다. 숱한 법리를 베고, 걷어내고, 자르며 여기까지 왔다. 나는 오늘은 원고지만 내일은 피고가 될 것이다. 내가 오늘 쓴 법리는 내일 상대방이 쓸 것이고, 내가 오늘 받은 승소판결은 다른 사건에서 내 목을 조를 수 있다. 내가 휘둘렀던 칼날은 언젠가 나를 겨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송은 가까이서 보면 상대방과 하는 싸움이지만, 멀리서 보면 결국 자기 자신과 하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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