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규범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칼린츠 2017. 10. 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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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이 규범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법실증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위 규범에서 하위 규범의 정당성이 나온다." 과연 그럴까? 역사를 돌이켜보자. 헌법이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헌법에서 하위 법률들이 태어나온 것이 아니다. 하위 법률에서 헌법이 연역된 것이다. 스멘트 같은 통합주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사회적 합의? 동화적 통합과정? 대체 그 사회적 합의가 "왜 사람을 죽여도 된다"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로 이루어졌단 말인가? 통합주의는 규범의 정당성에 대한 답이 되기에 부족하다.

 

최초로 누군가 누구를 찌른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는 울부짖는다. 불쌍하다. 가족들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다.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마음이 아프다.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는 감정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이 윤리를 만들고, 그 윤리가 법을 세운다. 헌법에서 생명권을 정하고 있어서 살인죄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어 마음이 고통스럽다. 그 고통스러운 마음이 살인을 금하는 규범을, 헌법의 생명권이란 개념을 만든 것이다. 규범의 정당성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니 센델의 방법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윤리학적 딜레마를 꾸준히 제시한다. 센델은 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벤담, 흄, 밀,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들인다. 그러나 실패한다. 어떤 이론도 딜레마를 명쾌히 풀지 못한다. 애초에 윤리적 문제는 이성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아닐까? 우리는 선을 보면 온기를 느낀다.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선과 악은 명징한 논리로 도출하는 문제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정서적인 문제다. 센델과 그 윤리학자들은 그 감정의 문제를 애써 논리적 문제로 치환하였다. 그들이 그 숱한 윤리적 딜레마들을 해결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 사회에서 최종적인 법적 판단을 내리는 곳은 법원이다. 소송에서는 감정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이 사람이 왜 처벌받아야 하나? 변호사, 판사, 검사는 건조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살해행위가 있었는지를 따지고, 행위와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그러나 윤리적 정당성의 문제는 감정의 문제다.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였는지, 그가 택한 살인의 방식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는지가 사실 불법성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그런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감정의 언어가 필요한데도, 감정의 언어는 허용되지 않는다.

 

가령 임대차 보호법은 주택임대기간을 최소 2년이라고 정했다. 왜 하필 2년일까? 그 정도면 '적당하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경제적 논거들은 그 감정적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동원될 따름이다. 그럼에도 주택임대기간이 문제된 사건에서, 변호사들은 '그 정도면 적당한 마음이 듭니다'라는 말은 절대 쓸 수 없다. 감정적 용어는 축줄된다. 자신의 감정을 이성의 언어로 논증하라고 요구받는다.

 

정의는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이성의 문제가 아닌 것을 이성의 언어로만 다룬다. 변죽만 울릴 수밖에 없다. 상징계로 포섭되지 않는 실재계가 존재하듯, 법정에서 다루는 용어는 사건의 전체를 다루지 못한다. 사건의 잉여가 항상 남는다. 사건은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법적 판단의 결과가 사회적 타당성을 종종 거스르는 건 이런 까닭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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