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계약의 무효와 취소 - 비진의표시

칼린츠 2020. 8. 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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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사와 표시의 불일치

 

 

나는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표시된 계약내용과 마음 속으로 의도한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성수동 토지를 매도한다"는 계약을 맺었지만, 계약서에는 "성수동 토지를 증여한다"고 적혀 있을 수 있다. 의사와 표시의 불일치. 이건 내가 부주의하게 계약서를 잘 읽어보지 않아 착각해서 발생할 수도 있고, 내가 일부러 실제 의도와 다르게 계약서를 작성하여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를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첫째, 의사표시를 한 사람(표의자)이 그 불일치를 알고 있는 경우다. 이를 비진의표시라 부른다(제107조). ② 둘째, 표의자와 상대방이 실제 의도한 계약내용과 다르게 표시하기로 합의한 경우다. 이를 허위표시라 부른다(제108조). ③ 셋째, 표의자가 의사와 표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다. 이를 착오라 부른다(제109조). 순서대로 살펴보자. 

 

 

 

2. 비진의표시

 

제107조(진의 아닌 의사표시) ①의사표시는 표의자가 진의아님을 알고 한 것이라도 그 효력이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표의자의 진의아님을 알았거나 이를 알 수 있었을 경우에는 무효로 한다.②전항의 의사표시의 무효는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가. 비진의표시의 의미

 

김씨는 물건을 줄 생각이 없으면서 "주겠다"고 말했다. 표시는 있으나 참된 의사가 없는 것이다. 이걸 진의 아닌 의사표시라 부른다. 이름이 너무 길지? '비진의표시'라고도 부른다. 줄 생각도 없었는데 "주겠다"고 말했으니, 누굴 탓하리오. 그 말을 한 김씨의 잘못이다. 그러니 표시된 대로 효력이 있다. 만약 상대방이 "알겠다"며 넙죽 받아버리면 그대로 증여계약이 성립한다. (제107조 제1항 본문)

 

반면 상대방이 "김씨가 말만 저렇게 하지, 속으로는 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고 하자. 이러면 김씨의 의사표시는 효력이 없다(제107조 제1항 단서). 상대방이 "고맙게 잘 받을게요"라고 말하더라도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 

 

민법전에는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그때마다 이 아홉글자를 계속 써야한다면 몹시 귀찮을 게다. 귀차니즘은 발명의 어머니다. 민법학자들은 '무언가를 알았다'는 표현대신 '악의'란 말을, '알 수 있었다'는 표현대신 '과실'이란 말을 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비진의표시는 원칙적으로 표시된 대로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악의 또는 과실이라면 효력이 없다."

 

한편, 주의할 것이 있다. 대법원은 말한다. "비진의표시에서 '진의'란 특정한 내용의 의사표시를 하고자 하는 표의자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지, 표의자가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바라는 사항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각주:1]

 

 

즉, 진의는 당신이 마음 속으로 품은 모든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저러한 내용으로 의사표시를 해야지!"라는 생각만을 말한다. 가령 박씨는 국가에 "모든 재산을 헌납한다"는 각서를 썼다. 이건 비진의표시일까?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박씨 曰 :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저를 여러번 연행하여 감금시켰습니다. 수사관들은 제게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갖은 협박과 회유를 당했습니다. 무서워서 결국 그대로 했습니다. 재산을 전부 국가에 주겠다고 해버렸습니다.

 

합동본부 수사관은 박씨에게 협박을 했다. 박씨는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주기 싫었다. 그저 억지로 주겠다고 했다. 마음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의와 표시가 다르지 않다. "재산을 준다"는 의사표시 자체는 하기 싫었을 것이지만, 속으로 "'모든 재산을 헌납한다'는 의사표시를 해야지"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에 따라 각서를 썼다. 진의와 표시는 일치한다.

 

이처럼 협박을 당해 하기 싫은 의사표시를 했더라도 비진의표시가 아니다. 어쨌든 그에게 그러한 의사표시를 하겠다는 진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비진의표시로 무효가 되지 않더라도,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가 되어 취소할 수는 있다.) [각주:2]

 

A는 다른 사람이 동일인 대출한도액 제한 규정에 걸려 더 이상 대출을 받지 못하자, 이름을 빌려줬다. 그 사람은 A의 이름으로 돈을 빌렸다. 즉, A는 '명의대여'를 해준 것이다. 대출약정은 A의 이름으로 체결됐다. A는 돈을 갚아야 할까? 대법원은 "법률상 또는 사실상의 장애로 자기 명의로 대출받을 수 없는 자를 위하여 대출금채무자로서 명의를 빌려준 자에게는 채무부담의 의사가 있다"고 했다. A의 의사표시는 비진의표시가 아니다. 주채무자로서 돈을 갚아야한다.[각주:3]

 

 

나. 선의의 제3자 보호규정

 

끝으로, 제107조 제3항은 “전항의 무효는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똑같은 규정이 허위표시를 정한 제108조에도 나온다. 바로 뒤에서 한큐에 몰아 설명한다. 

 

https://avalanche.tistory.com/88?category=1065606

  1. 대법원 1993. 7. 16. 선고 92다41528, 41535 판결 [본문으로]
  2. 대법원 1993. 7. 16. 선고 92다41528 판결 [본문으로]
  3. 대법원 1996. 9. 10. 선고 96다18182 판결, 대법원 1997. 7. 25. 선고 97다8403 판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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