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계약의 무효와 취소 - 계약이 고장났다, 무효와 취소의 이중효

칼린츠 2020. 7. 31.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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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이 고장났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레포트가 있다. 급해죽겠다. 앗, 갑자기 노트북이 먹통이다. 부품이 고장났나? 소프트웨어 버그인가? 답답할 노릇이다. 이렇게 노트북이 망가지는 것처럼 계약에 고장이 나기도 한다. 고장의 원인은 다양하다. 계약의 부품인 의사표시에 하자가 있을 수 있다. 의사표시를 조립해 만든 계약 내용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계약 내용이나 의사표시에 하자가 있다면 온전한 계약이라 볼 수 없다. 그 효력을 인정하기 어렵다. 당사자가 "이제부터 당신의 딸을 내 노예로 한다"는 계약을 맺었다고 하자. 당연히 허용할 수 없다. 계약은 사적자치의 실현수단이고, 사적자치는 어디까지나 우리 법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 협박을 당해 계약을 체결하였다면 그 계약의 효력도 마냥 인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계약도 사적자치의 진정한 실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계약은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자유롭게 결정했다'는 사실 때문에 구속력이 생긴다. 

 

그래서 법률행위나 의사표시에 문제가 있다면 민법은 그 효력을 무효로 하거나, 당사자가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고 한다.

 

우선, 다음과 같은 경우 계약이 무효가 된다. ① 의사무능력자가 의사표시를 한 경우, ② 계약의 목적이 원시적으로 이행불가한 경우(제535조), ③ 계약의 내용이 강행규정에 반하는 경우(제105조), ④ 계약의 내용이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경우(제103조),  ⑤ 불공정한 계약(제104조), ⑥ 진의 아님을 알고 한 의사표시를 상대방이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제107조 제1항), ⑦ 통정하여 허위의 의사표시를 한 경우(제108조 제1항)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경우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①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아야하는 사항인데도 제한능력자가 동의 없이 의사표시를 한 경우(제5조 제2항, 제10조 제1항, 제13조 제4항), ② 착오에 의해 의사표시를 한 경우(제109조 제1항), ③ 사기나 강박을 당해 의사표시한 경우(제110조 제1항, 제2항)이다.[각주:1] 

 

 

무효란 뭐고 취소란 뭐란 말인가

 

[사례] A는 매수인과 매매계약을 맺었다. A는 자신의 땅을 매수인에게 양도하고, 그 대신 2020년 8월 30일까지 10억원을 받기로 했다. 

 

무효는 말 그대로 '의사표시나 법률행위가 효력이 없다'는 뜻이다. 누가 "이제부터 무효라고 합시다"라고 주장해야 무효인 것도 아니다. 무효사유가 있다면 예전부터 쭉 무효였던 거다. 

 

반면 계약을 취소하려면 A에게 취소권이 있어야 한다. 그 취소권을 행사해야만 비로소 계약이 취소된다. 계약을 취소하면 계약은 소급적으로 소멸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처음부터 계약이 없었던 것처럼 된다.[각주:2] 

 

계약이 무효가 되든 취소가 되든, 계약은 처음부터 효력이 없었던 것이 된다. 당사자가 계약에 따라 이행한 것이 있으면 되돌려줘야 한다. [사례]에서 A가 계약에 따라 땅을 넘겨줬었다면, 계약을 취소한 뒤 "땅을 돌려주세요"라고 청구할 수 있다. 물론 A가 10억원을 받았다면 그 돈도 돌려줘야 한다. 상대방이 땅을 취득한 것이든, A가 돈을 받은 것이든 계약이 있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그 계약이 소급적으로 효력을 잃어버렸으니, A가 준 땅도, A가 받은 돈도 모두 부당이득이 된다. 반환해야 한다.[각주:3] 

 

이제 계약은 효력이 없다. 계약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효력이 없다. 이게 원칙이다. [사례]에서 A가 매수인에게 땅을 양도한 뒤에 매수인이 B에게 그 땅을 또다시 양도하였다. 그런데 A와 매수인이 맺은 매매계약에 알고보니 무효사유가 있다. 매수인은 땅을 취득하지 못한다. 그런 매수인에게서 땅을 양수한 B도 땅의 소유권을 취득하지 못한다. 만약 A가 B에게 "제가 맺은 매매계약이 무효가 됐으니, 땅을 돌려주세요"라고 요구하면 B는 하릴없이 내놓아야 한다. B가 "계약이 무효이더라도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할 문제 아닌가요?"라고 호소해도 소용없다. 무효인 계약은 누구에게나 무효이니까. 

 

다만, 몇몇 경우에는 민법이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해준다. 가령 제107조 제2항, 제108조 제2항, 제109조 제2항, 제110조 제3항은 무효나 취소를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한다. 이럴 때는 선의의 제3자가 보호받는다. 거래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다. 해당 파트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지금 전부 설명하면 나중에 쓸말이 없어지니까. 

 

 

무효와 취소의 이중효

 

무효인 계약이 있다. 이런 계약도 취소할 수 있을까? 넌센스다. 취소는 일단 살아있는 계약을 무효인 상태로 돌리는 거다. 계약이 무효라면 애초부터 효력이 없는 상태다. 이걸 다시 취소하여 무효로 돌린다? 말이 안된다. 이론적으로 취소할 수 없다고 해야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수 학자들과 판례는 무효인 계약도 취소할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토지거래허가구역 안에 있는 토지를 사고팔 때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만약 A가 토지거래허가 없이 매매계약을 체결한 경우 그 계약은 토지거래허가를 받을 때까지 무효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A는 자기가 사기를 당했음을 이유로 무효인 매매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각주:4]이미 효력이 없는 계약을 또다시 취소하여 효력이 없는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거다. 일종의 '부관참시'인 셈이다. 학자들은 이걸 '무효와 취소의 이중효'란 멋진 말로 포장한다. 알만한 양반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민법은 무효사유가 뭔지, 취소사유는 뭔지 정해놓고 있지만, 둘 사이에 무슨 절대적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가령 한국 민법은 계약내용의 중요부분에 착오가 있다면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각주:5], 일본은 법률행위 요소에 관해 착오가 있다면 의사표시가 무효라고 한다[각주:6]. 무효사유는 반드시 무효이어야 할 필연적 법칙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입법자가 입법 당시 무효사유로 본 것일 뿐이다. 

 

또, 누군가 내게 "계약을 이행하라"고 청구했다고 하자. 나는 "그 계약은 무효입니다" 혹은 "그 계약 취소할래요"라며 계약의 효력이 없다고 항변하고, 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 결국 무효이든 취소이든 권리행사 저지사유인 것은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무효사유이든 취소사유이든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갖다 쓸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것이 타당하다. 괜히 "무효는 취소할 수 없다"는 논리만 고수할 일이 아니다. 

 

  1. 김준호, 민법의 기초 제2판 집현재, 73면 참조 [본문으로]
  2. 민법 제141조(취소의 효과) 취소된 법률행위는 처음부터 무효인 것으로 본다. 다만, 제한능력자는 그 행위로 인하여 받은 이익이 현존하는 한도에서 상환(償還)할 책임이 있다. [본문으로]
  3. 제741조(부당이득의 내용) 법률상 원인없이 타인의 재산 또는 노무로 인하여 이익을 얻고 이로 인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이익을 반환하여야 한다. [본문으로]
  4. 대법원 1997. 11. 14. 선고 97다36118 판결 [본문으로]
  5. 제109조 [본문으로]
  6. 일본 민법 제95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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