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손해배상② - 손해배상액의 예정, 위약벌, 계약금

칼린츠 2020. 4. 1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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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해배상액의 예정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하려면 A가 입은 손해를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소송을 하면서 “제 손해는 대략 5억~8억 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주장한다면, 판사가 짜증을 낼 거다. “원고는 피고에게 5억~8억원 사이로 주고 싶은 만큼 지급하라”라고 판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손해액을 계산하는 일은 몹시 힘들다. 가령 A는 B한테서 재료를 사와서 농기계를 만드는 업자다. 그렇게 만든 농기계를 전국 100여곳에 납품한다. 만약 B가 재료를 제때 공급하지 않으면, A가 거래하는 업체 중에서 일부는 A와 거래를 중단할 것이다. 일부는 A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다. A가 입을 손해가 막대하긴 하다. 그치만 그 손해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자료를 일일이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고된 일이다. 

 

안전장치가 있다. 손해배상액의 예정을 하는 것이다. 만약 A가 계약을 맺을 때 이런 조항을 두면 어떨까? “B가 재료를 제때 공급하지 않으면 10억 원을 물어준다.” 이때는 A가 자신이 입은 손해를 일일이 계산할 필요가 없다. 사전에 합의한대로 “10억 원을 내놓으라”라고 청구하면 된다. 개꿀이다. 그저 채무자가 계약을 위반하였다는 사실(채무불이행 사실)만 입증하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각주:1] 간편하다.

 

그런데 극단적인 경우를 상상해보자. A가 입은 손해가 실제로는 500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손해배상액을 예정한 대로 “10억 원을 달라”고 청구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민법은 손해배상의 예정액이 ‘부당히 과다’하면 법원은 적당히 감액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제398조 제2항).[각주:2] 대법원은 ‘부당히 과다한 경우’란 다양한 사정을 참작하여 "일반 사회관념에 비추어 그 예정액 정도가 경제적 약자의 지위에 있는 채무자에게 부당한 압박을 가하여 공정성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라고 말했다.[각주:3] 실제 손해와 손해배상액의 예정액이 너무 크게 차이난다면 법원이 적당히 감액할 여지가 많다. 

 

 

 

2. 위약벌 약정

 

손해배상액의 예정과 구별해야할 약정이 있다.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바로 위약벌 약정이다. 손해배상액의 예정이 ‘손해액을 얼마로 합의하자’는 약속이라면, 위약벌 약정은 ‘채무불이행을 하면 그 벌로 추가적인 위약금을 배상하기로 합의하자’는 합의다. 

 

가령 A와 B가 재료공급계약을 맺었다. 채무불이행한 사람이 위약벌로 10억 원을 더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B가 재료공급을 제때 하지 않았다. A가 8억 원의 손해를 입었다. 이때 A는 8억 원의 손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위약벌 약정에 따라 10억 원의 위약금도 추가로 청구할 수 있다.

 

이처럼 위약벌 약정은 “너 채무이행을 안하면 손해배상은 당연히 해야하고, 위약벌로 위약금도 더 내야돼”라며 협박(?)하는 용도다. 채무자에게 압박감을 줘서 가급적 채무를 이행하도록 한다.

 

손해배상액의 예정인지, 위약벌인지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구별한다. ① 당사자들이 당사자들이 손해배상액을 다투지 않기로 하는 의도에서 손해액을 합의로 확정하였다면 그 약정은 손해배상액의 예정이다. ② 당사자들이 채무를 이행하도록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로 사적 제재를 두기로 합의하였다면 그 약정은 위약벌 약정이다. ③ 당사자의 의사를 잘 모르겠다면 일단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추정한다(제398조 제4항).[각주:4]

 

민법 제398조 제2항에 따라 손해배상액의 예정이 부당히 과다하다면 법원은 직권으로 감액할 수 있었다. 위약벌도 감액할 수 있을까? 민법에는 규정이 없다. 그렇지만 대법원은 위약벌 약정도 지나치면 전부 또는 일부가 무효가 된다고 한다. 근거는 민법 제103조다. “채권자의 이익에 비하여 약정된 벌이 과도하게 무거울 때에는 그 일부 또는 전부가 공서양속에 반하여 무효로 된다”고 판시한 것이다.[각주:5]

 

그러니 손해배상액의 예정이든 위약벌이든, 너무 무거우면 법원이 적당히 줄여줄 수 있다. 그 법적인 근거만 다를 뿐이다.

 

 

 

3. 계약금 약정

 

부동산 계약을 해본 적이 있나? 부동산은 겁나게 비싸다. 건물 한 채에 몇 억 원씩 한다. 한꺼번에 대금 전부를 주는 건 드물다. 보통은 계약할 때 계약금을 준다. 나중에 중도금과 잔금을 각각 치른다. 보통 매도인에게 잔금을 주면서 소유권이전등기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온다. 그 서류로 등기를 하면 드디어 내집 장만의 꿈이 실현된다. 

 

지금부터 얘기해볼 주제는 계약금이다. 부동산을 거래할 때 계약금은 보통 전체 대금의 10% 정도로 책정한다. 계약서를 쓰는 날 주는 경우도 있지만 며칠 정도 기간을 줄 때도 있다. 계약금을 꼭 부동산을 매매할 때만 주고받는 건 아니다. 계약을 맺을 때 상대방에게 계약금·보증금·착수금·선금 등의 이름으로 돈을 줄 때가 매우 많다. 모두 계약금의 일종이다.

 

계약금을 주고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는 계약을 맺었습니다’라고 하는 증거가 된다. 고로, 계약금은 증약금(證約金)이다. 그밖에도 계약금은 다음과 같은 법적 성질을 가진다. 

 

⑴ 계약금은 해약금으로 추정한다. 

 

565(해약금) 매매의 당사자 일방이 계약당시에 금전 기타 물건을 계약금보증금등의 명목으로 상대방에게 교부한 때에는 당사자간에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당사자의 일방이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 교부자는 이를 포기하고 수령자는 그 배액을 상환하여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551조의 규정은 전항의 경우에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

 

계약은 지켜야한다(pacta sunt servanda). 그러니 함부로 해제할 수 없다.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제할 수 있는 권리를 해제권이라 한다. 해제권은 상대방이 채무불이행을 했을 때 생긴다. 상대방이 계약을 멀쩡하게 잘 이행하고 있는데, 별안간 계약 해제할래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가 약속을 하여 “우리 이러저러한 경우에는 해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합시다”라며 미리 합의할 수 있다. 이렇게 미리 약속하여 마련한 해제권을 약정해제권이라고 한다. 사적자치 원칙에 따라 당사자가 해제권을 갖는 합의를 하겠다는 데 말릴 이유가 없다. 이런 약정해제권은 상대방이 채무불이행을 하지 않아도 약속한 사유만 발생하면 행사할 수 있다.

 

매매계약을 맺은 당사자가 계약금을 주고받았다면 해약금 약정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각주:6] 이제 당사자는 약정해제권을 갖는다. 해제가 자유롭다. 상대방이 채무불이행을 하지 않아도 해제할 수 있다. 대신 계약금을 이미 받은 사람이 해제하고 싶다면 그 2배를 돌려줘야하고, 계약금을 줬던 사람이 해제하려면 그 계약금을 포기해야 한다(제565조 제1항). A가 B에게서 계약금 5백만 원을 받았다고 하자. A가 해제하려면 1천만 원을 돌려줘야하고, B가 해제하려면 5백만 원을 돌려받길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다 계약금만큼은 경제적 손실을 봐야 해제할 수 있다. 각오하라구.

 

당신이 열심히 비용을 들여 계약이행을 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느닷없이 “저 계약 해제할래요”라고 하면 당신은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다. 그래서 해약금해제를 하는 데에는 한 가지 제약이 있다. 바로 “당사자 일방이 이행에 착수하기 전까지”만 해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제565조 제1항).[각주:7] 가령 당신이 이미 중도금까지 지불했다면 이미 이행에 착수한 상태다. 상대방은 해약금해제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중도금을 지급한 당신은 해제할 수 있을까? 즉, 이행에 착수한 그 사람이 해약금 해제를 하는 것은 가능할까? 대법원은 ‘이것도 안된다.’며 딱 잘라말한다.[각주:8] 옳다고 생각한다. 매도인이든 매수인이든 누구 하나가 이행에 착수하면 상대방은 “아, 이제 계약은 쉽게 해제되지 않겠구나”하고 신뢰하기 마련이다. 이미 이행에 착수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 해제하겠다고 딴소리를 하는 건 신의칙에 반한다.

 

⑵ 계약금은 위약금이 되기도 한다. 

 

계약금을 걸어두면서 위약금 약정을 할 수도 있다. 보통은 “매도인이 계약을 위반하면 매도인은 계약금의 배액을 지급하고, 매수인이 위반하면 계약금을 몰취한다.”는 특약을 계약서에 넣는다. 문구가 좀 복잡하지? 쉽게 말해, "계약을 위반하면 계약금만큼 돈을 내라"는 소리다. 계약위반에 대비한 장치다. 

 

일반적인 위약금 약정을 손해배상액의 예정과 위약벌로 나눌 수 있듯이, 계약금에 위약금 특약을 붙여놓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때 계약금은 손해배상액의 예정이 될 수도, 위약벌이 될 수도 있다. 

 

만약 A가 B에게 계약금 5백만 원을 줬다고 하자. 이 계약금이 손해배상액의 예정이라면 A가 계약을 위반했을 때 5백만 원만 포기하면 된다. 반면 위약벌이라면 A는 5백만 원도 포기하고 별도로 손해배상도 해줘야한다. 물론 둘 중에 분명하지 않으면 일단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추정한다(제398조 제4항).

 

 

한편, 당사자가 계약금만 주고받으면 해약금 약정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지만(제565조), 위약금 약정까지는 자동적으로 추정되지 않는다. 계약금이 위약금으로 되려면 별도 약정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A가 B에게 계약금 5백만 원만 덜렁 주었다면 해약금이다. 위약금은 아니다. A는 당사자 일방이 이행에 착수하기 전까지 자유롭게 해약금 해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B가 채무불이행을 하였을 때 A는 자기가 입은 실제 손해를 정확히 입증해야만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반면 A가 계약금을 주면서 'B가 계약을 위반하면 계약금의 배액을 돌려준다’고 약정하였다면? 위약금 특약까지 한 것이다. 계약금은 해약금이자, 위약금이다. A가 해약금 해제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B가 채무불이행을 하였을 때 손해액을 입증할 필요 없이 계약금 2배를 돌려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 (일단 위약금 약정은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추정받기에 그렇다. 만약 A가 단순히 손해배상액의 예정을 한 것이 아니라 위약벌 약정을 한 경우라고 하자. 이때는 A가 계약금 2배를 위약벌로 돌려달라고 청구할 수 있고, 여기에 실손해를 입증하여 추가적인 손해배상금까지 받을 수 있다.)

  1. 대법원 2007. 12. 27. 선고 2006다9408 판결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액이 예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채권자는 채무불이행 사실만 증명하면 손해의 발생 및 그 액을 증명하지 아니하고 예정배상액을 청구할 수 있고, 채무자는 채권자와 채무불이행에 있어 채무자의 귀책사유를 묻지 아니한다는 약정을 하지 아니한 이상 자신의 귀책사유가 없음을 주장·입증함으로써 예정배상액의 지급책임을 면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제398조(배상액의 예정) ①당사자는 채무불이행에 관한 손해배상액을 예정할 수 있다. ②손해배상의 예정액이 부당히 과다한 경우에는 법원은 적당히 감액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대법원 2002.01.25. 선고 99다57126 판결 [본문으로]
  4. 제398조(배상액의 예정) ④위약금의 약정은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추정한다. [본문으로]
  5. 대법원 1993.03.23. 선고 92다46905 판결 [본문으로]
  6. 물론 이 내용은 제567조에 따라 매매가 아닌 다른 유상계약에도 준용한다. [본문으로]
  7. 대법원은 “이행에 착수한다는 것은 이행행위 일부를 하거나 이행을 하는데 필요한 전제행위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8. 민법 제565조 제1항에서 말하는 당사자의 일방이라는 것은 매매 쌍방 중 어느 일방을 지칭하는 것이고, 상대방이라 국한하여 해석할 것이 아니므로, 비록 상대방인 매도인이 매매계약의 이행에는 전혀 착수한 바가 없다 하더라도 매수인이 중도금을 지급하여 이미 이행에 착수한 이상 매수인은 민법 제565조에 의하여 계약금을 포기하고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없다. 대법원 2000. 2. 11. 선고 99다62074 판결 [매매대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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