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판례정리

[민법판례정리] 계약교섭의 부당한 중도파기에 따른 손해배상책임과 범위

칼린츠 2017. 1. 29.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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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교섭의 부당한 중도파기에 따른 손해배상책임과 범위 - 대판 2003. 4. 11, 2001다53059

- 김준호 판례 270선, 윤동환 사례집, 박승수 사례집 수록 판례

 

 

[1] 계약이 성립하기 위하여는 당사자의 서로 대립하는 수개의 의사표시의 객관적 합치가 필요하고 객관적 합치가 있다고 하기 위하여는 당사자의 의사표시에 나타나 있는 사항에 관하여는 모두 일치하고 있어야 하는 한편, 계약 내용의 '중요한 점' 및 계약의 객관적 요소는 아니더라도 특히 당사자가 그것에 중대한 의의를 두고 계약성립의 요건으로 할 의사를 표시한 때에는 이에 관하여 합치가 있어야 계약이 적법·유효하게 성립한다.

 

[2] 계약이 성립하기 위한 법률요건인 청약은 그에 응하는 승낙만 있으면 곧 계약이 성립하는 구체적, 확정적 의사표시여야 하므로, 청약은 계약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사항을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3] 어느 일방이 교섭단계에서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하여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하였음에도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하여 손해를 입혔다면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자유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4] 계약교섭의 부당한 중도파기가 불법행위를 구성하는 경우 그러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는 일방이 신의에 반하여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교섭을 파기함으로써 계약체결을 신뢰한 상대방이 입게 된 상당인과관계 있는 손해로서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다고 믿었던 것에 의하여 입었던 손해 즉 신뢰손해에 한정된다고 할 것이고, 이러한 신뢰손해란 예컨대, 그 계약의 성립을 기대하고 지출한 계약준비비용과 같이 그러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통상 지출하지 아니하였을 비용상당의 손해라고 할 것이며, 아직 계약체결에 관한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이전 상태에서 계약교섭의 당사자가 계약체결이 좌절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출한 비용, 예컨대 경쟁입찰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출한 제안서, 견적서 작성비용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아니한다.

 

[5] 침해행위와 피해법익의 유형에 따라서는 계약교섭의 파기로 인한 불법행위가 인격적 법익을 침해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였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에 대하여는 별도로 배상을 구할 수 있다. 

 

 

 

Ⅰ. 사실관계

피고는 무역센터 부지 안에 수출 1,000억불 달성을 기념하는 영구조형물을 건립하기로 했다. 그래서 조각가 4명에게 조형물 시안제작을 의뢰하고, 그 중에서 한 작가를 골라 조형물 제작·납품·설치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피고는 원고를 포함한 조각가 4명에게 시안 작성을 의뢰했다. 그러면서 시안이 선정되면 그 작가와 나중에 조형물 제작, 납품, 설치계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점을 알렸다. 다만 조형물의 구체적인 제작비, 제작시기, 설치장소는 설명하지 않았다.

 

피고는 4명이 제출한 시안 중에서 원고의 시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고, 원고에게 그 선정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피고는 여러가지 내부 사정과 외부의 경제여건 때문에 원고와 계속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고에게 당선사실을 알린 때부터 약 3년이 지난 시점에 원고에게 조형물의 설치를 취소하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원고는 채무불이행책임과 불법행위책임을 근거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여기에 채무불이행책임이 근거로 포함된 건 원고가 원·피고 사이에 이미 계약이 성립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원고는 ① 시안을 제작하는 데 소요된 1000만원의 비용, ② 총제작비로 추정되는 금액의 약 20%에 해당하는 3억원의 재산상 피해, ③ 조형물 작가로서 지닌 명예감정과 사회적 명성이 침해되어 입게된 정신적 고통을 배상하라고 청구했다.

 

 

 

Ⅱ. 쟁점

 

① 원고와 피고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었을까? ② 원고는 피고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③ 만약 청구할 수 있다면 손해배상의 범위는 어떻게 될까?

 

Ⅲ. 대법원의 판단

 

1. 원고와 피고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었을까?

 

『계약이 성립하기 위하여는 당사자의 서로 대립하는 수개의 의사표시의 객관적 합치가 필요하고 객관적 합치가 있다고 하기 위하여는 당사자의 의사표시에 나타나 있는 사항에 관하여는 모두 일치하고 있어야 하는 한편, 계약 내용의 '중요한 점' 및 계약의 객관적 요소는 아니더라도 특히 당사자가 그것에 중대한 의의를 두고 계약성립의 요건으로 할 의사를 표시한 때에는 이에 관하여 합치가 있어야 계약이 적법·유효하게 성립한다. 계약이 성립하기 위한 법률요건인 청약은 그에 응하는 승낙만 있으면 곧 계약이 성립하는 구체적, 확정적 의사표시여야 하므로, 청약은 계약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사항을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 비록 피고가 작가들에게 시안 제작을 의뢰할 때 시안이 당선된 작가와 사이에 이 사건 계약을 체결할 의사를 표명하였다 하더라도 그 의사표시 안에 이 사건 조형물의 제작·납품 및 설치에 필요한 제작대금, 제작시기, 설치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아니하였던 이상 피고의 원고 등에 대한 시안제작 의뢰는 이 사건 계약의 청약이라고 할 수 없고, 나아가 원고가 시안을 제작하고 피고가 이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하더라도 원고와 피고 사이에 구체적으로 이 사건 계약의 청약과 승낙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2. 원고는 피고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어느 일방이 교섭단계에서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하여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하였음에도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하여 손해를 입혔다면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자유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 비록 원·피고 사이에 이 사건 계약에 관하여 확정적인 의사의 합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계약의 교섭단계에서 피고가 원고 등 조각가 4인에게 시안의 작성을 의뢰하면서 시안이 선정된 작가와 조형물 제작·납품 및 설치에 관한 이 사건 계약을 체결할 것을 예고한 다음 이에 응하여 작가들이 제출한 시안 중 원고가 제출한 시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고 원고에게 그 사실을 통보한 바 있었다.

 

원고로서는 이러한 피고의 태도에 미루어 이 사건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원고는 그러한 신뢰에 따라 피고가 요구하는 대로 이 사건 조형물 제작을 위한 준비를 하는 등 행동을 하였을 것임에도, 피고가 자신의 내부적 사정만을 내세워 근 3년 가까이 원고와 계약체결에 관한 협의를 미루다가 이 사건 조형물 건립사업의 철회를 선언하고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한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자유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3. 손해배상의 범위

 

『[4] 계약교섭의 부당한 중도파기가 불법행위를 구성하는 경우 그러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는 일방이 신의에 반하여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교섭을 파기함으로써 계약체결을 신뢰한 상대방이 입게 된 상당인과관계 있는 손해로서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다고 믿었던 것에 의하여 입었던 손해 즉 신뢰손해에 한정된다고 할 것이고, 이러한 신뢰손해란 예컨대, 그 계약의 성립을 기대하고 지출한 계약준비비용과 같이 그러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통상 지출하지 아니하였을 비용상당의 손해라고 할 것이며, 아직 계약체결에 관한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이전 상태에서 계약교섭의 당사자가 계약체결이 좌절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출한 비용, 예컨대 경쟁입찰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출한 제안서, 견적서 작성비용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아니한다.

 

[5] 침해행위와 피해법익의 유형에 따라서는 계약교섭의 파기로 인한 불법행위가 인격적 법익을 침해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였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에 대하여는 별도로 배상을 구할 수 있다.

 

→ ⑴ 정신적 손해 (O)

 

이 사건과 같은 피고의 계약교섭의 부당파기는 조형물 작가로서의 원고의 명예감정 및 사회적 신용과 명성에 대한 직간접적인 침해를 가한 불법행위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는 그로 인하여 원고가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이를 금전으로 위자할 책임이 있다.

 

→ ⑵ 재산적 손해  :

 

① 총 제작비 20%로 추정되는 창작비 3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이행이익배상청구이므로 불가)

 

원고가 재산적 손해라고 주장하는 추정 총 제작비 20% 상당의 창작비 3억 원의 손해는 결과적으로 이 사건 계약이 정당하게 체결되어 그 이행의 결과에 따라 원고가 얻게 될 이익을 상실한 손해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 계약교섭이 중도파기되었을 뿐 종국에 가서 적법한 계약이 체결되지 아니하여 원고로서는 계약의 이행을 청구할 수도 없고 또한 그 불이행책임을 청구할 아무런 법적 지위에 놓여 있지 아니하게 된 이상, 계약의 체결을 전제로 한 이와 같은 손해의 배상을 구할 수는 없다.

 

② 시안제작을 위해 소요된 비용 (신뢰손해가 아니므로 불가)

 

이 사건 조형물의 제작을 준비하기 위하여 지출하였다는 비용 중 피고의 공모에 응하여 시안을 제작하는 데 소요된 비용은 아직 피고로부터 계약체결에 관한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이전 상황에서 지출된 것이다. 원고로서는 그 공모에 응하여 당선되지 않더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지출한 비용에 불과하여 이 사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신뢰손해의 범위에 속한다고 볼 수도 없다. 그 이외에 달리 원고가 이 사건 계약의 체결을 신뢰하고 지출한 비용이 있음을 뒷받침할 아무런 자료도 기록상 찾아볼 수 없다.

 

⑶ 결론 (위자료만 청구가능)

 

원고의 위자료 청구를 인용한 반면 주장과 같은 재산상 손해에 관한 청구를 배척한 원심판결은 그 이유설시에 있어 다소 미흡한 점이 있으나 그 결론에 있어서 수긍할 수 있다. 거기에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친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한 법리오해의 위법이 없다.』

 

 

 

Ⅳ. 검토

 

1. 원·피고 사이에 계약이 성립했는지?

 

이 사건에서 문제된 계약의 법적 성질은 무엇인가? 조형물의 제작·납품·설치계약은 도급과 매매의 성격이 뒤엉킨 혼합계약이다. 원고가 피고의 주문대로 물건을 만드는 부분은 도급이랑 비슷한데, 이걸 피고에게 판다는 점은 매매랑 유사하다. 이럴 때 판례는 그 제작물이 "대체물이냐, 부대체물이냐"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대체물이면 매매, 부대체물이면 도급이라 본다. (외쳐!! 대매부도!!)[각주:1]

 

사안으로 돌아가보자. 원·피고 사이에 계약이 성립했을까? 계약이 성립하려면 일단 청약과 승낙이 있어야 한다. 피고는 이미 원고에게 시안제작을 의뢰했다. 원고의 시안을 당선작으로 선정까지 했다. 이미 청약이 이루어진건 아닐까?

 

청약은 승낙과 결합하여 계약을 성립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의사표시다. 청약의 내용은 확정적이어야 한다. 승낙자가 청약을 받고 '무릎을 탁'치며 단순히 동의만 하더라도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계약의 본질적 요소는 담고 있어야 한다. 조형물의 제작·납품·설치계약의 본질이 도급이라면, 적어도 도급의 핵심적 요소는 들어있어야 한다.

 

수급인은 일을 완성할 것을, 도급인은 그 보수를 지급할 것을 약정하면 도급계약이 성립한다. 도급계약의 본질적 요소는 일의 완성·인도의무, 보수지급의무이다. 따라서 도급계약이 성립하려면 완성할 일이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보수금액은 얼마인지가 정해져야 한다. 그러나 피고는 원고와 제작대금, 제작시기, 설치장소를 정한 적은 없다. 아직 도급계약의 본질적 요소가 빠져있던 셈이다. 아직 청약은 없었다. 그저 청약의 유인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계약은 성립하지 않았다.

 

 

 

2.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

 

원고와 피고 간에 아직 계약은 성립하지 않았다. 계약체결을 일방적으로 거부했다고 손해배상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계약체결을 하는 건 당사자들의 자유니까. 다만, "어느 일방이 교섭단계에서 계약이 확살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신뢰를 부여하고,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하여 손해를 입혔다면"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을 질 수 있다.

 

이 대상판결은 피고에게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을 인정했다. 아무리 '계약을 할지 안 할지'가 계약자유의 원칙에 관한 문제이더라도, 피고가 너무 얄미웠다. 계약을 안할 거면 알할 거지, 당선작 선정통보를 하고, 3년 동안이나 계약을 할 것처럼 뜸을 들였다. 일방적으로 파기당한 원고는 속이 뒤집힐 노릇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을 불법행위책임으로 볼지, 채무불이행책임으로 볼지 견해대립이 있다. 학설 대립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채무불이행은 일단 계약이 성립하고, 그 뒤에 채무자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아야 인정된다. 아직 계약이 성립하지도 않았는데, "쟤가 계약을 위반했어"라고 말하는 건 넌센스다. 그런데도 어째서 채무불이행 책임을 주장하는 학자가 있냐구? 그 중 한 분이 지원림 교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당사자들이 계약체결을 위한 준비단계 또는 계약의 성립단계에 들어가면 그들 사이에 사회적 접촉에 의하여 계약관계와 유사한 관계가 성립하며, 이러한 관계에 기하여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생명, 신체, 재산 등을 보호하고 그들의 정당한 이익을 배려하여야 할 보호의무(고지의무나 설명의무를 포함한다)를 부담하게 되는데, 이러한 보호의무를 위반한 데 대한 책임이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이다. 따라서 이 책임을 계약책임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지원림 민법강의  5-48]

 

 

 

지원림 교수는 계약체결이 형광등이 켜지듯 어느 순간 '확'하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두 당사자가 하나씩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러니 두사람이 계약준비 단계에 돌입하여 사회적 접촉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도 계약책임을 인정하는 거다.

 

그러나 지원림 교수 스스로도 자인한다. 지 교수도 이러한 '사회적 접촉이 이루어진 단계'를 진정한 계약관계로 부르지 못하고 있다. 그저 "계약관계와 유사한 관계"라 칭할 따름이다. 지원림 교수의 자인진술을 자백으로 원용하겠다. 계약관계와 비슷해보일 뿐이고, 아직 계약관계는 아닌 거다. 그런데 어떻게 계약책임을 물어요? 만약 계약책임을 인정한다면, 계약법체계를 교란한다. '채권·채무관계 없는 채무불이행책임'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우리나라와 달리 불법행위에 대한 일반조항이 없다. 그래서 채무불이행 책임 영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니 '계약체결상 과실책임'도 채무불이행책임으로 해결하는 거다. 그러나 우리 민법엔 만능해결사, 불법행위 책임의 맥가이버, 제750조가 있다. 굳이 계약이 체결되지도 않은 상황을 계약책임으로 처리하는 이론적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대상판결은 피고가 계약자유 원칙의 한계를 넘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으므로 '불법행위책임'을 진다고 밝혔다. 타당하다.

 

 

 

3. 손해배상의 범위

 

⑴ 재산적 손해배상

 

판례는 계약교섭의 일방적 파기가 있는 경우 손해배상범위를 '신뢰손해'에 한정한다. 판례가 말하는 신뢰손해란 "계약성립에 대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통상 지출하지 않았을 비용 상당의 손해"이다. 그러므로 "계약체결에 관한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이전 상태에서 계약교섭의 당사자가 계약체결이 좌절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출한 비용은 포함되지 않는다. 예컨대 경쟁입찰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출한 제안서, 견적서 작성비용은 신뢰손해가 아니다."

 

이러한 판례 태도에 대해서 반대하는 견해가 있다.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을 계약책임으로 해석하는 견해다. 계약교섭 당사자 사이에는 '계약유사의 법률관계'가 발생한다. 여기서 고지 · 설명 · 배려 · 보호 등의 의무가 발생한다. 계약 자체는 이러한 의무를 위반한 것이다. 그러므로 손해배상의 범위는 이런 의무 위반이 없었다면 채권자가 얻을 수 있었던 '이행이익'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계약체결의 부당파기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불법행위책임으로 이론구성한다면, 판례의 태도가 타당하다. 이행이익 배상은 계약이 성립한 것을 전제한다. 일단 계약은 성립했는데, 이걸 이행하지 않아 손해를 입힌 자에게 '계약을 이행했더라면 입지 않았을 손해를 배상하라'라고 요구하는 거다. 하지만 대상판결의 경우 계약은 성립하지 않았다. 이행이익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

 

 

왜 불법행위 책임이 성립하는가? 상대방에게 계약이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신뢰를 부여하고, 그 신뢰를 정당한 이유 없이 깨트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피고가 계약체결을 일방적으로 부당파기한 것의 위법성이 있다. 그러니 손해도 '피해자가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입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판례는 이걸 '신뢰손해'라고 표현했다.[각주:2]

 

원고는 재산상 손해로 ① 시안을 제작하는 데 소요된 1000만원의 비용, ② 총제작비로 추정되는 금액의 약 20%에 해당하는 3억원의 재산상 피해를 청구했다. 이 중에 무엇이 신뢰손해일까? 하나하나 따져보자.

 

대상판결에서 계약체결에 대한 신뢰는 '당선작으로 선정될 때' 생겼다. ①은 계약이 체결되리라는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이전에 지출한 비용이다. "계약체결이 좌절되더라도 어쩔 수 없지"라 생각하고 들인 돈이다. 신뢰손해에 해당하지 않는다.

 

②는 나중에 조형물의 제작·납품·설치계약이 체결되면 청구할 수 있는 돈의 일부다. 이행이익 배상의 일부를 청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뢰손해에 해당하지 않는다.

 

결국 ①② 둘 다 신뢰손해가 아니다. 원고는 모두 청구할 수 없다.

 

 

⑵ 정신적 손해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청구에서 정신적 손해가 있다면 재산적 손해와는 별도로 청구할 수 있다. 대상판결은 원고가 조형물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여, 피고가 3년 동안이나 질질 끌고 계약을 파기한 것이 원고의 명예감정과 사회적 명성을 침해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를 하라고 했다.

 

 

  1. 당사자의 일방이 상대방의 주문에 따라 자기 소유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물건을 공급할 것을 약정하고 이에 대하여 상대방이 대가를 지급하기로 약정하는 이른바 제작물공급계약은, 그 제작의 측면에서는 도급의 성질이 있고 공급의 측면에서는 매매의 성질이 있어 이러한 계약은 대체로 매매와 도급의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 적용 법률은 계약에 의하여 제작 공급하여야 할 물건이 대체물인 경우에는 매매로 보아서 매매에 관한 규정이 적용된다고 할 것이나, 물건이 특정의 주문자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부대체물인 경우에는 당해 물건의 공급과 함께 그 제작이 계약의 주목적이 되어 도급의 성질을 띠는 것이다. (출처 : 대법원 1996.06.28. 선고 94다42976 판결) [본문으로]
  2. 김동훈, 계약교섭의 중도파기와 손해배상책임, 고시연구(2003. 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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