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판례정리

[민법판례정리] 대리권 소멸한 뒤 복대리인을 선임했을 때도 민법 제129조의 표현대리가 성립하는가?

칼린츠 2017. 1. 2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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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판례정리] 대리권 소멸한 뒤 복대리인을 선임했을 때도 민법 제129조의 표현대리가 성립하는가? - 대법원 1998.05.29. 선고 97다55317 판결

- 2012년 사시 1차 기출, 박승수 사례집, 김준호 민법판례 250선 수록 판례

 

표현대리의 법리는 거래의 안전을 위하여 어떠한 외관적 사실을 야기한 데 원인을 준 자는 그 외관적 사실을 믿음에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는 책임이 있다는 일반적인 권리외관 이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인 점에 비추어 볼 때, 대리인이 대리권 소멸 후 직접 상대방과 사이에 대리행위를 하는 경우는 물론 대리인이 대리권 소멸 후 복대리인을 선임하여 복대리인으로 하여금 상대방과 사이에 대리행위를 하도록 한 경우에도, 상대방이 대리권 소멸 사실을 알지 못하여 복대리인에게 적법한 대리권이 있는 것으로 믿었고 그와 같이 믿은 데 과실이 없다면 민법 제129조에 의한 표현대리가 성립할 수 있다.

 

 

<참조조문>

제127조(대리권의 소멸사유) 대리권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으면 소멸된다. 1. 본인의 사망 2. 대리인의 사망, 성년후견의 개시 또는 파산

제129조(대리권소멸후의 표현대리) 대리권의 소멸은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그러나 제삼자가 과실로 인하여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Ⅰ. 사실관계

 

 

 

1981년 12월 26일, 갑은 을 은행에게 자기 소유 X토지의 처분 권한을 위임했다. 그러나 1983년 10월 26일, 갑은 사망하고 말았다. 피고는 갑의 상속인이다.

 

그 상태에서 1984년 7월 25일, 을 은행은 병 공사에게 X토지의 처분을 재위임했다. 1989년 9월 11일 병 공사는 원고와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약속한 날짜에 매매대금도 받았다. 원고는 피고에게 소유권이전등기를 청구했다.

 

 

 

Ⅱ. 쟁점과 원심의 판단

 

원고는 피고에게 소유권이전등기절차를 이행하라고 했다. 피고는 무권대리 항변을 했다. 이미 갑이 사망한 다음에 병 공사에게 복대리권이 수여됐다는 것이다. 원고는 제129조 표현대리 재항변을 했다.

 

원심은 민법 제129조 대리권 소멸 후 표현대리가 성립하려면, 일단 처음에는 유효한 대리권이 있다가 나중에 소멸한 경우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을 은행이 병 공사에 대리권을 수여해줄 때 이미 본인 갑이 사망한 상황이었다. 병 공사에 부동산 처분을 위임한 것 자체가 무효이다. 원심은 "아예 대리권이 없었기 때문에, 대리권 소멸 후의 표현대리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Ⅲ.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의 판결요지는 이렇다. 대리인이 대리권 소멸한 뒤 복대리인을 선임하여 대리행위를 하게했을 때에도 민법 제129조 표현대리가 성립할 수 있다고 했다.

 

『표현대리의 법리는 거래의 안전을 위하여 어떠한 외관적 사실을 야기한 데 원인을 준 자는 그 외관적 사실을 믿음에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는 책임이 있다는 일반적인 권리외관 이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인 점에 비추어 볼 때, 대리인이 대리권 소멸 후 직접 상대방과 사이에 대리행위를 하는 경우는 물론 대리인이 대리권 소멸 후 복대리인을 선임하여 복대리인으로 하여금 상대방과 사이에 대리행위를 하도록 한 경우에도, 상대방이 대리권 소멸 사실을 알지 못하여 복대리인에게 적법한 대리권이 있는 것으로 믿었고 그와 같이 믿은 데 과실이 없다면 민법 제129조에 의한 표현대리가 성립할 수 있다. (출처 : 대법원 1998.05.29. 선고 97다55317 판결)』

 

따라서 을 은행이 자신이 가진 대리권이 소멸한 뒤에 병 공사를 복대리인으로 선임했더라도, 민법 제129조의 표현대리가 성립할 수 있다고 했다. 원고가 선의·무과실인지를 더 살펴보고, 표현대리가 인정되는지 더 판단하라며,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했다.

 

 

 

Ⅳ. 검토

 

1. 을 은행의 복임권 인정여부

 

이 대상판결에서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은 문제가 있다.

 

을 은행과 같은 임의대리인은 원칙적으로 복임권이 없다. 다만 본인의 승낙을 받거나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 예외적으로 복대리인을 선임할 수 있다(제120조).[각주:1] 을 은행은 본인의 승낙을 받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병 공사를 복대리인으로 선임했다. 을 은행에게는 아예 복임권 자체가 없었던 건 아닐까?

 

그러나 본인이 "복대리인을 쓰세요"라고 명시적으로 승낙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묵시적'으로 승낙을 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때가 있다. 예컨대 대리를 하라고 한 법률행위의 성질상 꼭 대리인이 처리하지는 않아도 되는 경우이다(대판 1996. 1. 26, 94다30690).

 

구체적으로 무엇이 여기에 해당하는지는 개별 사건마다 법률행위 해석으로 판단해야 한다. 가령 오피스텔 분양업무나 아파트 분양업무는 성질상 반드시 그 대리인의 처리가 필요하다[각주:2]. 대리인의 능력에 따라 분양사업의 성공여부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본인은 어떤 대리인이 유능해서 믿고 맡겼는데, 어느날 갑자기 확인해보니 그 대리인이 자기 허락도 받지 않고 딴 놈에게 일을 죄다 시켜 담당하게 했다면 환장할 노릇이다.

 

반면 채권자를 정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돈 좀 빌려와라"라며 대리인에게 일을 맡겼다고 하자. 이건 대리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일을 처리하더라도, 대충 부동산 담보가액에 맞게 돈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맡든 큰 상관은 없다. 그래서 "복대리인을 선임해도 된다"는 묵시적 승낙이 있다고 볼 수 있다[각주:3].

 

대상판결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 갑과 을 은행의 계약내용이야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단순히 부동산을 처분하는 일을 누가하든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갑에게 묵시적으로 복대리권 선임을 승낙하는 의사를 인정할 수 있다. 을 은행은 복임권이 있다.

 

 

 

2. 복임행위의 유효여부

 

그러나 본인이 사망하면 대리인이 받은 대리권은 소멸한다(민법 제127조)[각주:4]. 사안에서 본인 갑은 이미 사망했는데, 을 은행은 이걸 무시하고(혹은 모르는 상태에서) 병 공사를 복대리인으로 선임했다. 을 은행은 권한을 잃은 상태에서 병 공사를 선임한 것이다. 복임행위는 무효이다. 병 공사는 처음부터 대리권이 없었다.

 

 

 

3. 제129조 '대리권 소멸 후의 표현대리' 성립여부

 

여기가 이 판결의 핵심이다.

 

대리인 을 은행의 대리권이 소멸했다. 그런데도 을 은행은 복대리인을 선임했고, 그 복대리인은 대리행위를 했다. 복대리인은 애초부터 대리권을 전혀 갖지 못한 자이다. 그런데도 제129조 대리권 소멸 후의 표현대리를 인정할 수 있을까? 대상판결은 인정한다. 학자들도 큰 견해대립 없이 판례를 지지한다.

 

논리적으로 따지면야, 이 사건에서 대리권 소멸 후 표현대리를 부정하는 게 옳다. 대리권이 있다가 소멸한 상황이 아니라, 애당초 복대리인에게 대리권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대리를 왜 인정하는가? 외관주의로 거래안전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권리관계를 표상하는 외관을 만든 잘못이 있는 사람은 그걸 믿고 거래한 사람에 대해 책임지라는 것이다. 본인이 대리인에게 대리권을 준 이상, 그 대리인이 복대리인을 선임하든, 자기가 직접 대리행위를 하든, 본인이 책임지는 게 외관주의에 부합한다.

 

만약 대상판결과 같은 상황에서 제129조의 표현대리를 부정한다면 괴상한 결과를 낳는다. 어떤 사람이 대리인을 선임한 뒤 사망했다. 그 대리인이 직접 대리행위를 하면 제129조 표현대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복대리인을 선임하여 대리행위를 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게 말이되나? 이익상황은 똑같다. 따라서 판례가 대리인이 대리권을 소멸한 뒤에 복대리인을 선임하여 법률행위를 한 경우에도 제129조의 표현대리를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다.

 

 

 

 

  1. 민법 제120조(임의대리인의 복임권) 대리권이 법률행위에 의하여 부여된 경우에는 대리인은 본인의 승낙이 있거나 부득이한 사유있는 때가 아니면 복대리인을 선임하지 못한다. [본문으로]
  2. 대판 1996. 1. 26, 94다30690, 대판1999. 9. 3. 97다56099 [본문으로]
  3. 대법원 1993. 8. 27. 선고 93다21156 판결 [본문으로]
  4. 제127조(대리권의 소멸사유) 대리권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으면 소멸된다. 1. 본인의 사망 2. 대리인의 사망, 성년후견의 개시 또는 파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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