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인 자는 처벌받는다. 규범의 정당성은 어디에 나오는가. 법실증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위 규범에서 하위규범의 정당성이 나온다.' 과연 그럴까? 역사적으로 봤을 때, 헌법이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헌법에서 하위 법률들이 태어나온 게 아니라, 하위 법률들에서 헌법이 만들어졌다. 사회적 합의? 동화적 통합과정? 그 사회적 합의가 왜 사람을 죽이면 된다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로 이루어졌단 말인가?
누군가 누구를 찔렀다. 그 사람이 아프고 불쌍해 보였을 것이다. 그 가족들이 마음아파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는 감정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이 윤리를 만든다. 그 윤리가 불문법을 만든다. 그 불문법에서 성문법이 나오고, 헌법을 만든다. 헌법에서 생명권을 정하고 있기 때문에 살인죄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어 마음이 고통스럽다. 그 고통스러운 마음이 살인을 금하는 사회도덕을 만들고, 살인죄 처벌규정을 만들고, 헌법의 생명권을 만든다.
센델의 방법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센델은 윤리학적 딜레마를 제시한다. 벤담, 흄, 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끌어다가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그 딜레마를 명쾌히 해결하지 못한다. 윤리적 문제는 어쩌면 이성의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닐까? 선과 악은 감정을 동요시킨다. 악을 보면 분노를, 선을 보면 평온을 얻는다. 감정의 문제를 애써 논리적 문제로 치환하였기 때문에 센델이 윤리적 딜레마를 풀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소송에서 감정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윤리적 정당성의 문제는 감정의 문제. 이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왜 나쁘냐? 그 사람의 살인방식은 피해자를 매우 고통스럽게 하는 방식이고, 가족들을 마음 아프게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쁘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그 말을 쓸 수가 없다. 마치 센델이 윤리적 딜레마 해결에 실패하는 것처럼, 소송은 감정의 언어를 쓰지 않아 윤리학적 문제를 마치 이성의 언어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다룬다.
가령 임대차 보호법에서 주택임대기간을 왜 최소 2년이라고 정한걸까? 그 정도면 '적당하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경제적 근거들은 사후적으로 뒤따른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 정도면 적당한 마음이 듭니다'라는 말은 절대 쓸 수 없다. 그런 감정적인 용어는 축출된다. 자신의 생각을 이성의 언어로 논증하라고 요구한다. 어쩌면 이성의 문제가 아닌 것을 이성의 언어로만 다룬다. 그러니 변죽만 울릴 수밖에 없다. 사태는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법적 판단의 결과가 사회적 타당성을 거스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