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계약의 무효와 취소 - 착오

칼린츠 2020. 8. 22.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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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오취소>
제109조(착오로 인한 의사표시) ①의사표시는 법률행위의 내용의 중요부분에 착오가 있는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때에는 취소하지 못한다. ②전항의 의사표시의 취소는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A는 중고차를 2천만 원에 사기로 했다. 매도인에게서 중고차를 인도받았다. 돈도 2천만 원을 입금해줬다. 그런데 갑자기 매도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왜 2천만 원밖에 안주셨어요?" A는 당황했다. "우리 중고차 값을 2천만 원으로 하기로 했잖아요." 매도인은 화를 냈다. "2천만 원이 아니라, 3천만 원으로 하기로 했잖아요!" A는 계약서를 찾아보았다. 아뿔싸. 계약서에는 "A는 중고차를 3천만 원에 산다"고 적혀있었다. A가 잘못 표시한 것이다. A는 계약 내용을 착오했다. 

 

이처럼 표의자가 자신이 의사와 다른 표시를 한다는 사실을 미쳐 모르면서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착오'다. A가 착오로 의사표시를 한 건데 무조건 계약을 지켜야 한다면 조금 불쌍하다. A가 자신의 진의와 표시가 다르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민법은 이를 긍휼히 여긴다. A가 착오로 법률행위를 했다면 취소할 수 있단다(제109조). 정 안되겠다면 A는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착오취소의 요건

 

이번에는 상대방인 매도인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A가 갑자기 게약을 취소해버렸다. 뭔 날벼락인가? 매도인은 '중고차 가격을 3천만 원으로 하자'는 계약을 맺었고, 그에 따라 3천만 원을 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A가 착각했다나 뭐라나하면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하려고 한다. 그게 A 잘못이지, 내 잘못인가? 착각을 한 건 A인데, 엉뚱하게 상대방인 매도인이 예측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뒤집어쓴다. 

 

그래서 착오를 했다고 아무때나 취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109조를 다시보자. ① 취소를 하려면 법률행위 내용의 '중요부분'을 착오했어야 한다. ② 의사표시를 한 사람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어야 한다. A가 계약을 취소하고 싶다면 "중고차 가격은 계약의 중요한 부분입니다"라고 주장하며 이를 입증해야 한다.[각주:1] 반면 계약이 취소되는 걸 매도인이 막으려면 "A가 착오를 일으킨 데에는 중대한 과실이 있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이를 증명해야 한다.[각주:2]

 

 

 

계약내용의 중요부분

 

계약내용의 중요부분인지는 무얼 기준으로 정할까? 민법전에는 안나온다.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판례는 주관적 기준과 객관적 기준을 활용한다. 취소하려는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 그 착오가 없었으면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을 정도이어야 하고(주관적 기준), 일반사람도 그 사람의 처지에 놓였다면 그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객관적 기준).[각주:3] 기준이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가령 B는 이웃 대지 경계선이 자신의 실제 경계선과 일치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그 경계선대로 담장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대법원은 "이와 같은 토지 현황경계를 착오하는 것은 법률행위 중요부분을 착오한 것"이라고 하였다.[각주:4] 그러니 B는 담장 설치 합의를 취소하고 그 담장을 철거하라고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표의자가 착오는 했는데, 그 착오로 무슨 경제적 불이익을 당한 게 없다면 중요한 부분을 착오했다고 볼 수는 없다. 가령 C가 당신을 위해 보증을 섰다. C가 보증계약을 맺을 때는 당신이 채권자와 소비대차계약을 맺은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준소비대차계약이었다.

 

소비대차는 뭐고, 준소비대차는 뭐냐고? 일반적으로 돈을 빌리는 계약을 금전소비대차 계약이라 부른다. 준소비대차는 원래 금전 기타 대체물을 지급할 의무가 있는 경우에(예컨대 매매대금채무) 이걸 소비대차 계약상 채무로 바꾸자고 약속하는 것이다. 소비대차나 준소비대차나 보증인 입장에선 도진개찐이다. C는 어차피 당신의 소비대차상 채무를 보증하려했다. 소비대차가 준소비대차로 바뀐다고 하여 C에게 경제적 불이익이 없다.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이걸 문제삼아 착오를 이유로 보증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각주:5]

 

 

 

동기의 착오 
   

D는 양돈단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땅이 필요했다. 그는 땅을 판다는 사람을 만나, "당신의 땅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대규모 땅을 구입하는 매매계약이 체결됐다. D는 부품 꿈에 젖었다. 그런데 웬걸? 알고보니 그 땅은 구 국토이용관리법에 따라 개발촉진지역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양돈단지 조성용으로는 쓸 수 없었다. D는 착오를 이유로 매매계약을 취소할 수 있을까? [각주:6]

 

엄밀히 말해서 D는 의사표시 자체에 착오가 없다. D는 "땅을 사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려 했고, 실제로 "당신의 땅을 사겠다"는 표시를 했다. ("당신의 땅을 빌리고 싶다"로 말해야 할 것을 "당신의 땅을 사고 싶다"고 말한 경우와 비교해보자. 이때는 의사표시 자체를 착오한 것이다.) D는 의사표시 자체를 착오한 것이 아니다. 의사표시가 이루어지기 이전단계인 동기에 착오가 있을 뿐이다. 의사표시를 착오한 적이 없는데도 '착오'를 이유로 계약을 취소할 수 있을까? 이른바 ‘동기(動機)를 착오했다는 이유로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다. 

 

판례입장은 이렇다. ① 동기를 착오한 것은 의사표시의 착오가 아니다. 원칙적으로 동기를 착오한 것만으로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 ② 다만, 표의자가 그 동기를 의사표시 내용으로 삼을 것을 상대방에게 표시하고, 의사표시의 해석상 법률행위 내용으로 된 경우에는 취소할 수 있다. ③ 이때 당사자들 사이에 별도로 그 동기를 의사표시 내용으로 삼기로 하는 합의까지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각주:7]

 

판례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D는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 다만, 만약 D가 땅을 사겠다는 제의를 하면서 "제가 양돈단지를 조성하려고 땅을 사는 겁니다"라고 동기를 표시했고, 당사자끼리 양돈단지를 조성하는 데 공법적 제약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서로 양해가 되어 있었다고 하자. 이 경우에는 비로소 D가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계약을 맺는 동기는 표의자의 주관적인 사정이다. '내가 계약을 맺은 동기가 잘못되었어'라는 이유만으로 계약을 취소할 수 있게 하면 상대방에게 너무 불리하다. 게다가 동기는 표의자 자신이 내린 판단이다. 그 판단이 잘못되었으면 표의자가 책임지는 것이 타당하다. 동기가 되었던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만을 이유로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고 해야한다. 그렇지만 표의자가 계약을 맺는 동기를 표시했고, 그것이 해석상 법률행위 내용으로 된 경우에는 상대방도 대비할 기회가 생긴다. 그러니 이때는 취소를 허용해도 괜찮다. 

 

나아가 상대방이 표의자의 착오를 유발했으면 동기가 표시됐는지 무관하게 계약 취소를 쉽게 인정한다. 법률행위 중요부분이라는 점도 잘 인정한다. 상대방을 보호할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가령 E의 이웃 사람이 "당신의 주택이 내 땅 경계선을 넘어왔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래서 E는 자기 주택이 진짜 경계선을 넘어간 줄로 착오하여 그동안 경계침범에 대한 보상금 명목으로 금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E의 주택은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았었다. 대법원은 "진정한 경계선에 관한 동기의 착오는 이웃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여 생긴 것"이라면서 E는 보상금 지급 약정을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각주:8]

 

 

 

표의자의 중과실 없음

 

한편, 표의자가 착오를 하는 데에 중대한 과실이 있다면 착오를 이유로 취소할 수 없다.[각주:9] 중대한 과실이란? 대법원은 "표의자의 직업, 행위의 종류, 목적 등에 비추어 당해 행위에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주의를 현저하게 결여한 것"을 말한다고 했다.[각주:10] 쉽게 말해, 주의의무를 현저히 결여한 것이다. 웬만해선 중과실이 있었다고 인정받기 어렵다. 

 

F는 씨비닐 생산 공장경영자다. 영업이 잘되어 매출액과 종업원이 늘었다.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다른 건물을 임차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은 공업배치법에 따라 공장신설 허가가 나지 않는 지역이었다. 건물을 임차하더라도 새롭게 공장신설을 할 수 없는 상황. F는 임대차계약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F는 먼저 건물에서 그가 경영하고자 하는 공장 신설이 가능한지 관할관청에 알아보았어야 했다"고 하며, "F가 관할관청에 물어보기만 했다면 쉽게 건물에 대한 공장신설허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보인다"고 했다. F는 중대한 과실이 있으므로 계약을 취소하지 못한다고 했다.[각주:11]

 

주의할 점이 있다. 취소하려는 자에게 '중과실'이 아니라, '경과실'이 있을 뿐이라면 착오를 이유로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당신이 아파트를 사는 계약을 맺었는데, 느닷없이 상대방이 "내가 계약 내용을 착오했으니 취소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상대방에게는 경과실 밖에 없다. 당신이 계약이 취소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고, 복덕방에 수수료까지 지불했어도 계약이 취소되는 건 막을 수 없다. 당신은 상대방이 아무리 얄미워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민법이 착오를 이유로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으므로, 착오취소권을 행사하는 게 위법하진 않기 때문이다.[각주:12]

 

그러나 당신이 손해배상을 받아야 할 현실적 필요성은 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민법을 개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경과실로 착오를 한 사람의 계약 취소는 허용해야겠지만, 그에 따라 상대방이 입은 손해는 물어줘야하는 것으로 고치자는 것이다. 

 

만약 표의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기는 한데, 상대방이 표의자가 착각한 걸 알면서 이용했다면 어떨까? 이때는 상대방을 보호해줄 필요가 없다. 취소를 하기 위해선 중대한 과실이 없어야 한다는 요건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판례는 이 경우에는 표의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더라도 취소할 수 있다고 한다.[각주:13]

 

 

  1. 대법원 2008. 1. 17. 선고 2007다74188 판결은 "착오를 이유로 의사표시를 취소하는 자는 법률행위의 내용에 착오가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착오가 의사표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 즉 만약 그 착오가 없었더라면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본문으로]
  2. 대법원 2005. 5. 12. 선고 2005다6228 판결은 "민법 제109조 제1항 단서에서 규정하는 착오한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 유무에 관한 주장과 입증책임은 착오자가 아니라 의사표시를 취소하게 하지 않으려는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라고 판시했다. [본문으로]
  3. 대법원 1997. 8. 26. 선고 97다6063 판결 [본문으로]
  4. 대법원 1989. 7. 25. 선고 88다카9364 판결 [본문으로]
  5. 대법원 2006. 12. 7. 선고 2006다41457 판결 [본문으로]
  6. 대법원 1996. 11. 8. 선고 96다35309 판결 [본문으로]
  7. 대법원 1995. 11. 21. 선고 95다5516 판결 [본문으로]
  8. 대법원 1997. 8. 26. 선고 97다6063 판결 [본문으로]
  9. 민법 제109조 제1항 본문 [본문으로]
  10. 대법원 2000. 5. 12. 선고 2000다12259 판결 [본문으로]
  11. 대법원 1993. 6. 29. 선고 92다38881 판결 [본문으로]
  12. 대법원 1997. 8. 22. 선고 97다카13023 판결 [본문으로]
  13. 대법원  1955. 11. 10. 선고 4288민상321 판결, 대법원 2014. 11. 27. 선고 2013다49794 판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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