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계약의 무효와 취소 - 매매계약 무효·취소에 따른 부당이득 반환관계

칼린츠 2020. 12. 15.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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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약이 무효이거나 취소가 되면 계약의 효과는 생기지 않는다. 

 

계약이 무효이거나 취소가 되었다면 계약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 이제 계약이 사라졌으니 계약 당사자들은 계약에 따른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 A가 B에게 돼지 여섯 마리를 200만 원에 파는 계약을 맺었다고 하자. 만약 이 계약이 무효라면 당사자들은 아무 의무를 지지 않는다. A는 돼지를 주지 않아도 된다. 이미 죽어버린 계약은 채권도, 채무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2. 이미 준 게 있으면 부당이득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 

 

[사례] A가 B에게 돼지 여섯마리를 200만 원에 팔기로 하는 계약을 맺었다. 

 

 

만약 이미 이행해버린 게 있다면 어찌할 것이냐. A가 계약에 따라 B에게 돼지를 넘겨준 상태였다. 뒤늦게 이 계약이 무효라는 점이 밝혀졌다. B가 돼지를 받을 수 있었던 근거는 당사자들이 매매계약을 맺었다는 것에 있다. 이 계약이 무효라면 B가 돼지를 받을 근거가 사라진다.

 

제741조는 법률상 원인 없이 타인의 재산 또는 노무로 이익을 얻은 자는 그 이익을 반환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처럼 법률상 원인 없는 이익을 부당이득이라고 한다. B는 돼지를 가지고 있을 법률상 원인이 없으므로 이 물건은 부당이득이 된다. A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제741조(부당이득의 내용) 법률상 원인없이 타인의 재산 또는 노무로 인하여 이익을 얻고 이로 인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이익을 반환하여야 한다.

 

제748조에 따르면 부당이득의 반환범위는 이러하다. ① 부당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받은 자("선의의 수익자"라고 부른다)는 그 받은 이익이 현존하는 한도에서 부당이득반환의무를 부담한다.[각주:1] B가 받은 돼지들 중에서 죽거나 없어진 돼지가 있다면 지금 당장 남아 있는 것만 반환하면 된다는 거다. ② 반면, 부당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받은 자("악의의 수익자"라고 부른다)는 받은 이익에 이자를 붙여 반환하고 손해가 있으면 손해배상까지 해야 한다.

 

제748조(수익자의 반환범위) ①선의의 수익자는 그 받은 이익이 현존한 한도에서 전조의 책임이 있다. ②악의의 수익자는 그 받은 이익에 이자를 붙여 반환하고 손해가 있으면 이를 배상하여야 한다. 

 

 

 

3. 물건의 과실도 반환해야 할까?

 

민법학에서 과실(果實)은 단순히 나무 열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실은 물건에서 생기는 모든 수익을 말한다. 천연과실은 물건의 용법대로 거두어들이는 산출물을 말한다.[각주:2] 돼지가 낳은 새끼, 젖소에서 짠 우유, 닭이 난 달걀, 광산에서 캐낸 광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법정과실은 물건의 사용대가로 받는 돈이나 물건을 말한다.[각주:3] 집 사용료, 대여금에 붙는 이자가 여기에 속한다. 

 

만약 B가 돼지를 부당이득했다가 그 돼지가 새끼 돼지를 낳았다고 하자. 경사났다. 이 새끼 돼지도 반환해야 할까? 원칙적으로는 맞을 것 같다. 과실은 원물의 연장이고, B는 과실을 취득할만한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B가 부당이득이 될지 모르고 돼지를 받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제748조는 현존 이익 한도에서 부당이득을 반환하라고 하였으니, 새끼 돼지도 현존한다면 반환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매매계약이 무효가 되면 A가 B에게 돼지 소유권을 양도한 물권행위도 무효가 된다. 돼지 소유권은 A에게 자동복귀한다. A는 이제 부당이득 반환청구권만이 아니라, 소유권에 기초하여서도 아무 권원 없이 돼지를 갖고 있는 B에게 "돼지 내놓으시오"라고 청구할 수 있다. 이때는 제201조가 적용된다. 아래를 보면 알겠지만 소유자가 반환청구하였을 때 선의 점유자는 그 물건의 과실을 취득할 권리를 가진다. [각주:4]

 

제201조(점유자와 과실) ① 선의의 점유자는 점유물의 과실을 취득한다. ②악의의 점유자는 수취한 과실을 반환하여야 하며 소비하였거나 과실로 인하여 훼손 또는 수취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 과실의 대가를 보상하여야 한다. ③전항의 규정은 폭력 또는 은비에 의한 점유자에 준용한다.

 

이제 문제가 발생한다. A가 제741조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을 행사하면 B가 선의일 때 과실을 반환해야 한다(물론 제748조에 따라 현존 이익 한도 내에서). 반면, 제213조 소유물반환청구권을 행사하면 B가 과실을 반환하지 않아도 된다. 민법은 선의 점유자 B가 새끼 돼지를 돌려주어야 한다고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도 한다. 아아, 어쩌란 말인가.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대법원은 제201조가 선의 점유자에게 과실을 취득할 권리를 인정하므로 B가 법률상 원인 없이 물건을 취득하였더라도 선의로 점유한 것이라면 그 과실이나 사용이익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본다.[각주:5] 다만, 제201조 제2항은 악의의 점유자에게 과실을 수취할 권리가 없다고 할 뿐, 받은 이익에 이자를 붙여 반환할 의무까지 없다고 규정하지는 않으므로, B가 악의 점유자라면 제748조에 따라 받은 이익에 이자를 붙여 반환해야 한다고 본다.[각주:6]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B가 부당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돼지를 취득한 것이라면 새끼 돼지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결론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계약이 무효이므로 B는 자신이 법률상 원인 없이 취득한 돼지들을 부당이득으로 반환해야 한다. 당연히 과실도 돌려줘야 한다. 그러나 B가 선의 점유자라면 제201조 제1항에 따라 과실을 취득할 권리를 갖는다. 새끼 돼지는 B가 취득할 '법률상 원인'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B가 선의라면 과실을 부당이득으로 반환해야 할 이유가 없다.[각주:7] 

 

 

 

4. 원물이 아니라 돈을 돌려받아야 하는 경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반대로 B가 A에게 돼지 값 200만 원을 이미 준 상태라고 해보자. 계약이 무효라면 A가 얻은 200만 원은 부당이득이다. B는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을 행사하여 그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  

 

돼지의 과실이라면 새끼 돼지이겠지만, 돈의 과실이라고 볼 수 있는 건 그 돈의 '운용이익'이다. 쉽게 말해 그 돈을 '굴려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가령 A가 200만원을 은행 정기예금에 넣어놓아 돈이 230만원으로 불어났다고 하자. B에게 이 돈을 돌려줄 때 이러한 운용이익도 과실에 준하여 함께 돌려줘야 할까? [각주:8]

 

그런데 아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돈은 점유 있는 곳에 소유 있다"는 원칙이 있다. 돈은 가치의 표상일 뿐 구체적인 물성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A와 B 사이의 계약이 무효라고 할지라도 그 돈을 가지고 있는 A가 여전히 그 돈의 소유자다. B에게 돈의 소유권이 자동적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B는 부당이득반환청구권 이외에 소유물반환청구권은 행사할 수 없다. 

 

따라서 원물이 아니라 돈을 돌려달라고 청구하는 경우에는 제201조와 제748조의 충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제201조 제1항은 적용되지 않아 선의 점유자에게 과실을 취득할 권리가 있네, 없네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A가 선의일지라도 그 돈의 과실을 돌려주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대단히 부당하다. B가 선의 매수인이라면 돼지를 돌려주더라도 그 새끼 돼지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A는 선의 매도인인에도 그 돈의 운용이익을 반환해야 한다니? 왜 쟤는 먹는데 나는 못먹어? 불만이 나올만 하다.

 

그래서 대법원은 A가 선의 매도인이라면 대금의 운용이익을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즉, "쌍무계약이 취소된 경우 선의의 매수인에게 제201조가 적용되어 과실취득권이 인정되는 이상 선의의 매도인에게도 제587조의 유추적용에 의하여 대금의 운용이익 내지 법정이자의 반환을 부정함이 형평에 맞다."고 선언한 것이다(대법원 1993. 5. 14. 선고 92다45025 판결). 그러니 A가 선의 매도인이라면 200만 원만 돌려주면 충분하고, 운용이익인 30만 원은 가져도 된다.

 

 

 

 

5.  동시이행관계

 

동시이행의 항변권은 쌍무계약관계에서 인정되는 권리이지만, 쌍무계약관계를 벗어난 관계에서도 대법원이 형평의 원칙에 따라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은 이미 설명하였다.

(avalanche.tistory.com/59?category=1065606)

 

A와 B가 맺은 매매계약이 무효가 되었을 때 A는 돼지를, B는 대금을 돌려달라고 청구할 수 있고, 이는 쌍무계약 자체에서 발생한 채권은 아니다. 쌍무계약 자체는 효력이 없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계약이 무효로 되어 부당이득반환관계가 생기는 바람에 A와 B에게 각각 권리가 생긴 것인데, 두 사람의 권리도 동시에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공평하다. 만약 A는 B에게서 아직 돼지를 못받았는데도 먼저 돈부터 돌려주어야 한다면 A는 불안해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법원은 공평과 신의칙을 근거로 매도인의 반환의무와 매수인의 반환의무는 동시이행관계에 있다고 하였다.[각주:9] B가 돼지는 반환하지 않으면서 다짜고짜 A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A는 동시이행의 항변권을 행사하여 그 반환을 거절할 수 있다. 

 

  1. 민법 제741조 [본문으로]
  2. 민법 제101조 제1항 [본문으로]
  3. 민법 제101조 제2항 [본문으로]
  4. 선의의 점유자라 함은 과실수취권을 포함하는 권원이 있다고 오신한 점유자를 말하고, 다만 그와 같은 오신을 함에는 오신할 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대법원 2000. 3. 10. 선고 99다63350 판결) [본문으로]
  5. 대법원 1987.09.22. 선고 86다카1996,1997 판결 [본문으로]
  6. 대법원 2003. 11. 14. 선고 2001다61869 판결 [본문으로]
  7. 김준호, 민법강의, 697면 [본문으로]
  8. 대법원 2008. 1. 18. 선고 2005다34711 판결은 운용이익의 경우 사회통념상 수익자의 행위가 개입되지 아니하였더라도 부당이득된 재산으로부터 손실자가 통상 취득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 범위 내에서는 반환해야 할 이득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하면서, 정기예금에 예치하여 얻은 이자상당액은 구체적 사정에 따라 부당이득반환 범위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였다. "금전을 정기예금에 예치함에는 예치자의 특별한 노력이나 비용, 수완 등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실제로 피고 역시 별다른 노력이나 비용 등을 들이지 않고 이 사건 매매대금을 정기예금에 예치하여 그 이자를 수령하였으며, 또한 이 사건 매매대금이 정기예금에 예치되어 있던 기간의 대부분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7.말부터 2002. 2.까지로서 예금의 이율이 역사상 이례적으로 높던 시기이므로 일반인의 경우 여유자금이 있다면 통상 은행에 예금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할 것이고, 위 매매대금과 같은 거액의 금전을 장기간 예금하는 경우에는 보통예금보다는 정기예금에 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사정이 이와 같다면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 정기예금이자 상당액은 사회통념상 피고의 행위가 개입되지 아니하였더라도 위 매매대금으로부터 원고가 통상 취득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 범위 내의 이익으로 볼 수 있어, 피고가 반환해야 할 이득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9. 대법원 1993. 5. 14. 선고 92다45025 판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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