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 : 물권법] 물건의 인도② - 선의취득

칼린츠 2023. 1. 29.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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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취득

 

A는 노트북 소유자다. 그는 B에게 노트북을 빌려줬다. B는 그 노트북을 A의 허락도 받지 않고 C에게 팔았다. C는 B가 노트북을 가지고 있길래 마냥 B가 소유자인 줄로만 알고 노트북을 구입했다. C는 노트북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을까?

 

일견 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구라도 물권을 넘기는 처분행위를 하려면 일단 그 물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B에게는 소유권이 없으니 당연히 C는 그에게서 소유권을 넘겨받을 수 없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C는 소유권을 취득한다. 그러므로 덩달아 A는 소유권을 잃어버린다. 아래 제249조 선의취득 제도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평온, 공연하게 동산을 양수하여 선의·무과실로 그 동산을 점유하였다면 양도인이 소유자가 아닌 경우에도 그 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한다. B가 진짜 소유자가 아님에도 그에게서 평온, 공연, 선의, 무과실로 물건을 산 사람은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이다!

 

제249조(선의취득) 평온, 공연하게 동산을 양수한 자가 선의이며 과실없이 그 동산을 점유한 경우에는 양도인이 정당한 소유자가 아닌 때에도 즉시 그 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한다.

 

민법 제197조 제1항은 점유자가 그 물건을 선의·평온·공연하게 점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양수인이 동산의 점유를 넘겨받았을 때 그 무과실은 추정되지 않으나, 선의·평온·공연 점유는 추정된다. 따라서 굳이 양수인이 “내 점유가 선의·평온·공연 점유이다”라고 증명할 필요는 없다. 양수인이 선의취득하지 못했다며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반대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점유개정에 의한 선의취득 가능여부

 

그런데 주의할 게 있다. 동산을 점유개정 방식으로 인도받은 사람은 선의취득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이다.[각주:1] (점유개정이 무엇인지는 [민법입문 : 물권법] 물건의 인도① - 물건의 점유를 넘기는 방법 (tistory.com) 참조)

 

A는 인쇄기 소유자다. A는 B에게 그 인쇄기를 빌려줬다. B는 그 인쇄기가 자신의 것이라 속이고 C에게 그 인쇄기를 팔아버렸다. 대신, B가 C에게 인쇄기를 아예 현실인도해 준 것은 아니었다. 매도 이후에도 B 자신이 계속 직접점유하며 사용하기로 약정했다. 이른바 ‘점유개정’으로 인도한 것이다. 이때 C는 인쇄기의 소유권을 선의취득할 수 있을까? 인쇄기의 소유자는 A일까, C일까?

 

 

판례에 따르면 점유개정으로 선의취득을 할 수 없다. C는 점유개정으로 인도를 받았으니 선의취득하지 못한다. 인쇄기 소유권은 여전히 A에게 있다. (C는 소유권을 취득하지 못하였으니, C는 B에게 채무불이행책임이나 자신을 속인 불법행위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점유개정 방식으로는 선의취득이 안된다는 걸까? 선의취득을 인정하면 진짜 소유자는 소유권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진짜 소유자와 양수인 중 누구를 보호해 줄 필요가 있는지를 비교해봐야 한다. 점유개정은 양도인이 예전처럼 물건을 계속 직접점유하는 방식이다. 겉보기에는 양도인이 양수인에게 진짜 인도했는지 알기 어렵다. 양도인과 양수인이 실제 거래를 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거래를 한 것처럼 뻥을 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정확하지 않은 사실관계로 원래 소유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지나치다. 그래서 다수설과 판례는 양수인이 점유개정으로 동산을 인도받은 것만으로는 선의취득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현실인도를 받으면 선의취득이 가능하다. 위 사례에서 C가 점유개정으로 인도를 받은 단계에서는 선의취득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뒤 C가 아예 B의 영업장을 찾아가 인쇄기를 가져왔다면 현실인도까지 받은 것이다. C는 인쇄기를 선의취득한다. 기존 소유자 A는 그 소유권을 잃어버린다.

 

 

 

선의취득과 공신의 원칙

 

등기나 점유와 같은 공시방법 내용이 실제 권리관계와 일치하면 다행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다. 부동산 소유권등기부에는 ‘강백호’가 소유자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서태웅’이 소유자인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또 동산을 점유하는 사람은 ‘채치수’이지만 실제로는 ‘변덕규’가 소유자인 경우도 있다.

 

공신의 원칙은 등기나 점유로 공시된 내용을 믿고 거래한 자는 그 공시된 내용대로 보호해야 한다는 법원칙이다. 세계인권선언처럼 모든 나라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원칙은 아니다. 나라마다 채택하는 곳도 있고, 채택하지 않는 곳도 있다. 채택한 나라 중에서도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각양각색이다.

 

한국은 선의취득 제도를 두고 있다. 당신이 동산을 점유하는 사람을 소유자라고 믿고 동산을 넘겨받았다면 그 사람이 진짜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소유권을 취득한다. 선의취득 제도는 공신의 원칙을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선의취득은 오직 동산에만 적용된다(제249조). 부동산 거래에는 선의취득 제도가 없다. 그러니 한국 민법은 동산 물권변동에는 공신의 원칙을 적용하지만, 부동산 물권변동에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동산 점유상태를 믿고 거래한 자는 보호받지만, 부동산 등기를 믿고 거래한 자는 그 등기내용이 잘못되었을 때 보호받지 못한다는 소리다. (다만, 각종 제3자 보호규정으로 보호 받는 것은 별개 문제다.)

 

[사례] 갑은 아파트 소유자이다. 갑은 강제집행을 회피할 목적으로 을과 짜고 허위의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그에 따라 을 앞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병은 을이 진짜 소유자인 줄 알고, 을한테서 아파트를 매수하였다. 병은 아파트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는가?

 

⑴ 갑과 을이 짜고 맺은 매매계약은 통정허위표시에 해당하여 무효이다(제108조 제1항). 원인행위인 채권행위가 무효이면 그에 따른 물권행위도 무효이다(유인설). 따라서 을은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더라도 소유권을 취득할 수 없다.
⑵ 동산물권은 선의취득이 가능하지만(제249조) 부동산물권은 선의취득할 수 없다. 따라서 병이 등기내용을 신뢰하고 선의·무과실로 평온·공연하게 아파트를 취득하였더라도 선의취득할 수 없다.
⑶ 다만 통정허위표시의 무효는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민법 제108조 제2항). 갑과 을은 자신들이 맺은 무효의 매매계약을 병에게 주장할 수 없다. 그에 따라 소유권을 취득한다.
⑷ 결국 병은 부동산을 선의취득할 수는 없지만 제108조 제2항의 ‘선의의 제3자’에 해당하여 소유권을 취득한다.

 

공신의 원칙을 인정하면 거래안전이 보호된다. 사람들은 공시된 내용만 믿고 거래하면 되기 때문이다. 더 마음놓고 거래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권리자의 권리를 부당하게 박탈할 수 있다. 양수인이 권리를 선의취득하면 진짜 소유자가 권리를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한국의 민법은 모든 물권변동이 아니라 오직 동산물권변동에만 공신의 원칙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동산거래는 부동산거래보다 훨씬 빈번하다. 부동산보다는 거래안전을 더 보호할 필요가 있다.

  1. 대법원 1964. 5. 5. 선고 63다775 판결, 대법원 1978. 1. 17. 선고 77다187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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