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채무불이행③ - 불완전이행, 이행거절

칼린츠 2020. 3. 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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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완전이행도 있다!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채무불이행이다. 이행기가 되었는데도 이행하지 않으면 이행지체다. 이행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이행하지 않으면 이행불능이다. 이행지체와 이행불능만 있으면 모든 채무불이행 상황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이행지체와 이행불능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 채무를 불이행할 수도 있나? 

 

물론이다. 아래 사례를 보자. 

 

A가 B에게 말 사료로 옥수수를 팔기로 했다. A는 옥수수를 인도했고, B는 그 옥수수를 사료로 먹였다. 그런데 거기에 독성이 있는 피마자 열매가 껴 있었다. 그걸 먹은 B의 말들은 죽어버렸다. 

 

A는 어떤 채무불이행을 한 것일까. 일단 이행불능은 아니다. 옥수수 넘기는 일은 가능했고, 실제로도 넘겼으니까. 이행지체도 아니다. 변제기에 맞춰 옥수수를 넘겼으니까. A의 행위는 이행불능으로도, 이행지체로도 설명할 수 없다. 세상에! 채무자가 이행을 했는데도 채권자가 손해를 입을 수 있다니!

 

불완전이행은 채무자가 이행은 했는데 불완전하게 이행하여 채권자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를 말한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 첫째, 채무자가 이행을 하였는데 이행한 내용 자체가 불완전한 경우다. A가 B에게 사과 100상자를 인도하기로 약정했다. 그런데 A가 90상자만 인도하였다거나 받은 사과 가운데 일부가 썩어있었다. 그러면 불완전이행이 된다. 

 

② 둘째, 채무자가 이행을 부적절하게 하여 채권자가 계약관계를 떠나 생명, 신체, 재산에 대한 추가적인 확대손해를 입은 경우다. 갑은 농약 판매상이고, 농부한테 농약을 팔았다. 갑은 농약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용감하게도 그는 농약을 팔면서 이 농약과 다른 농약들을 1:1:1로 섞어서 쓰라고 잘못된 조언을 했다. 농부는 그걸 듣고 농약을 섞어 뿌렸다. 이후 농부가 키우던 작물이 모두 죽어버렸다. 큰 손해를 입었다. 갑이 농약에 대해 잘 모르면 잠자코 있을 노릇이다. 괜히 오지랖부려 잘못된 정보를 주었으니 불완전이행이다. 농부가 입은 손해를 물어주어야 한다.[각주:1]

 

 

한편, 채무자가 채권자의 생명·신체·재산을 침해하지 않도록 배려할 의무를 보호의무라고 한다. 문제는 계약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채무자가 이러한 보호의무를 계약의무의 하나로 부담하냐는 거다. 예전에는 적극 천성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왜냐? 채무자와 채권자가 계약을 맺으면 이제 채권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협력하는 관계에 있다는 이유에서다. 단순한 남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 채무자는 그저 급부만 이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걸 넘어 채무를 이행하면서 채권자의 생명·신체·재산을 침해하지 않도록 배려할 일반적인 의무도 계약에 근거하여 부담한다고 본다는 거다.

 

[사례] 창수는 준호에게 탁자를 팔기로 했다. 창수는 직접 탁자를 들고 준호네 집에 갔다. 그런데 아뿔싸! 탁자를 나르다가 옆에 있는 꽃병을 깨트려버렸다. 채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본래 급부와 무관하게 준호의 재산에 손해를 입힌 것이다. ① 창수와 준호가 맺은 매매계약에 일반적인 보호의무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본다면 이것도 불완전이행이다. 창수는 준호에게 채무불이행책임을 진다. ② 반면, 그러한 보호의무는 계약상 인정되지 않는다고 본다면, 채무불이행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이 견해를 따르더라도 창수는 불법행위책임을 질 수 있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보호의무를 계약상 의무로 인정하지 말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채무불이행 책임은 어디까지나 채무에 속하는 의무를 불이행한 경우에만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보호의무를 긍정하는 입장은 본래 급부의무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채무자에게 별개의 보호의무가 있다고 보는 것이어서 타당하지 않다. 계약에서 예정하지도 않은 의무를 계약의 내용이라고 우기는 꼴이다. 만약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본래 급부와 무관하게 채권자의 신체나 재산을 침해했다면, 불법행위에 근거한 손해배상책임을 지우면 충분하다(민법 제750조).[각주:2]

 

그러나 판례의 입장은 다른 것 같다. 아래와 같이 숙박계약에 따라 숙박업자는 고객의 안전을 배려할 보호의무를 진다. 판례는 숙박업자가 이러한 의무를 위반하였으면 채무불이행책임을 진다고 했다. 보호의무를 계약상 의무로 본 것이다. 

 

<대법원 1994.01.28. 선고 93다43590 판결>
숙박업자는 통상의 임대차와 같이 단순히 여관의 객실 및 관련시설을 제공하여 고객으로 하여금 이를 사용수익하게 할 의무를 부담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객에게 위험이 없는 안전하고 편안한 객실 및 관련시설을 제공함으로써 고객의 안전을 배려하여야 할 보호의무를 부담하며 이러한 의무는 앞서 본 숙박계약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신의칙상 인정되는 부수적인 의무로서 숙박업자가 이를 위반하여 고객의 생명, 신체를 침해하여 동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불완전이행으로 인한 채무불이행책임을 부담한다 할 것이다.

 

어쨌든 불완전이행이 성립하였을 때, 채권자는 완전이행을 청구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계약을 해제할 수도 있다고 해야 한다.[각주:3](불완전이행이란 개념의 등장, 발전, 비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하자. 「 불완전이행이란 무엇인가」 https://avalanche.tistory.com/75)

 

 


2. 또다른 채무불이행 유형인 '이행거절' : 나는 이행을 거절해버릴 것이야!

 

가. 이행거절의 의의와 종류 

 

이행불능과 이행지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또 있다. 이행거절이다. 이행거절은 말 그대로 채무자가 "나 이행 안할래요"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냥 툴툴대는 수준이 아니라, 이행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백하고 종국적으로 표시해야 한다.[각주:4] 채무자가 빼째라고 나올 때 채권자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빡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행거절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채무불이행 유형이다. 예전에는 이행거절을 논의하는 학자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관련 판결들이 자꾸 쌓이는 거다. 학계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채무불이행 유형으로 정리했다. 요즘에는 거의 모든 민법 교과서에서 이행거절 정도는 소개한다. 

 

채무자가 이행거절을 하는 경우를 둘로 나눠보자.

 

⑴ 하나는 채무자가 이행기가 지났음에도 이행을 거절하는 경우다. 이건 이행지체니까 이행지체 법리로 해결하면 된다. 채권자는 이행지체를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계약을 해제할 수도 있다. 다만 일반적인 이행지체라면 해제하기 전에 최고를 해야 하지만, 민법은 채무자가 미리 이행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면 최고 없이도 해제할 수 있다고 한다.[각주:5] 채무자 스스로 이행을 안하겠다고 말했으니, 굳이 최고절차를 거치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괜히 귀찮게만 할 뿐이다. 

 

⑵ 다음으로 아직 이행기가 되지 않았는데 채무자가 미리부터 이행을 거절하는 경우가 있다. 무슨 법리를 적용해야할까? 이행지체? 아직 이행기가 안 지났다. 이행불능? 아직 채무이행 자체는 가능하다. 그저 채무자가 이행을 안 할 뿐이다.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법리가 없다. 그래서 ‘채무자가 이행기 전에 이행거절을 하는 경우’를 독자적인 채무불이행 유형으로 파악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거다. 판례가 이행거절이 독자적인 채무불이행 유형이라고 명시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행거절’이란 개념 자체는 곧잘 쓰고 있으니 독자적인 유형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각주:6]

 

나. 채무자가 이행거절을 하면 채권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수 학자들은 채무자가 이행기 전에 ‘이행하지 못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면 이행불능에 준하는 효과를 주면 된다고 한다. 채무자가 “배째라”라고 하면 현실적으로 이행을 기대할 수 없으니 이행불능과 상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판례도 유사한 입장이다. 판례는 ① 채무자가 이행거절의 의사를 밝혔다면 채권자는 이행기 전이라도 최고 없이 계약을 해제할 수 있고[각주:7], ② 채무자가 이행을 거절했을 때의 급부목적물 시가를 기준으로 전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다고 한다.[각주:8]  

 

어때? 최고 없이 계약을 해제할 수 있고, 전보배상도 청구할 수 있고. 이행불능과 똑같지?

 

[사례] A는 B에게서 부동산을 구입하기로 하는 매매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A가 B에게 중도금을 주려고하는데도 B는 받기를 거절하고, 부동산을 넘겨주지도 않겠다는 의사를 명백히하였다. 이 경우 A는 B의 소유권이전등기의무 이행기일을 기다릴 필요 없이 B의 이행거절을 이유로 곧장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각주:9]
  1. 대법원 1995. 3. 28. 선고 93다62645 판결 각색 [본문으로]
  2. 제750조(불법행위의 내용)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본문으로]
  3. 채권총론 제6판, 곽윤직 100~101면 [본문으로]
  4. 대법원 2003. 2. 26. 선고 2000다40995 판결 [본문으로]
  5. 제544조[이행지체와 해제] 당사자 일방이 그 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상대방은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그 이행을 최고하고 그 기간 내에 이행하지 아니한 때에는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자가 미리 이행하지 아니할 의사를 표시한 경우에는 최고를 요하지 아니한다. [본문으로]
  6. 대법원 1993. 6. 25. 선고 93다11821 판결, 계약법 제2판 양창수, 김재형 공저 404면도 참조 [본문으로]
  7. 대법원 1993. 6. 25. 선고 93다11821 판결 [본문으로]
  8. 대법원 2007. 9. 20. 선고 2005다63337 판결은 “이행지체에 의한 전보배상에 있어서의 손해액 산정은 본래의 의무이행을 최고한 후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당시의 시가를 표준으로 하고, 이행불능으로 인한 전보배상액은 이행불능 당시의 시가 상당액을 표준으로 할 것인바, 채무자의 이행거절로 인한 채무불이행에서의 손해액 산정은, 채무자가 이행거절의 의사를 명백히 표시하여 최고 없이 계약의 해제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이행거절 당시의 급부목적물의 시가를 표준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9. 대법원 1993. 6. 25. 선고 93다11821 판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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