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채무불이행의 의의와 유형론

칼린츠 2020. 1. 2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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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무불이행의 의의와 유형론

 

채무자가 채무를 제대로 이행하면 얼마나 좋겠냐만, 현실에선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일이 너무 많다. 덕분에 분쟁이 생기고, 법조인들이 밥을 먹고 산다. 채무자의 잘못으로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되거나 이행하지 않는 경우를 싸잡아 ‘채무불이행’이라 한다.

 

제390조(채무불이행과 손해배상)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에는 채권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없이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민법 제390조를 보면 알겠지만 민법은 채무불이행을 상당히 포괄적으로 정의한다. 채무불이행이란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것이다. 현실에서 채무자가 채무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않는 방식은 다양하다. 채무자가 노트북을 넘기기로 했었는데 그 노트북을 잃어버려 양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도 채무불이행이다. 채무자가 약속한 날짜에 돈을 주기로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면서 주지 않고 있다. 이것도 채무불이행이다. 그래서 민법은 제390조에 포괄적인 조항을 두었다. 조문 하나로 다양한 채무불이행 사건을 일망타진하겠다는 전략이다.

 

법이 이렇게 포괄적인 규정을 두었더라도 채무불이행을 유형화할 필요는 있다. 채무불이행이란 개념이 너무 막연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한식, 일식, 중식으로 분류하듯이, 채무불이행의 유형을 구분할 수 있다. 각 유형마다 그 성격에 맞게 요건과 효과를 정리할 수 있다. 이러면 각 유형에 알맞는 분쟁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다.

 

과거에는 많은 민법 학자들이 채무불이행의 3유형론을 들고 나왔다. 3유형론은 채무불이행을 셋으로 구분한다. 채무를 더이상 이행할 수 없는 상태인 이행불능, 이행이 지연되고 있는 상태인 이행지체, 이행을 하긴 했는데 부족한 불완전이행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3유형론을 까는 학자들이 많다. 달랑 이 3가지 만으로 모든 채무불이행 유형을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남의 땅을 침범하지 말아야할 채무’를 지고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의무를 위반하여 땅을 넘어갔다. 이건 이행불능도, 이행지체도, 불완전이행도 아니다. 애초에 무한한 채무불이행의 태양을 달랑 3개의 틀만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게 화근이다.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다. 굳이 “채무불이행의 유형은 세 가지다”라고 한정지을 필요가 없다. 채무불이행의 유형은 무한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을 열어두자. 우리가 앞으로 하나씩 ‘발굴’해나간다는 기분으로 채무불이행의 유형들을 세워나가는 게 바람직하다. 채무불이행 유형을 캐내는 광부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채무불이행 유형은 여러가지다. 다만 여기서는 그 가운데 이행불능, 이행지체, 불완전이행, 이행거절에 대해서만 다룬다. 채무자가 채무불이행을 하면 채무불이행책임을 진다. 채무불이행 책임이라고 하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채무불이행 유형마다 다르겠지만, 채무자는 적어도 ① 손해배상을 해야하거나 ② 계약해제를 당할 수도 있다. 각 채무불이행 유형마다 손해배상의 범위와 해제의 요건이 어떻게 다른지는 차차 비교하자.

 

 

 

2. 채무불이행책임의 공통적인 요건 : 고의‧과실

 

아참, 주의하자. 어떤 채무불이행이든,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채무불이행 책임을 물으려면, 그 채무불이행에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이 있어야 한다. 단지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만약 채무를 이행하지 못한 데에 채무자에게 아무런 잘못(즉, 고의‧과실)이 없다면 채무자는 채무불이행을 지지 않는다(제390조 단서).

 

가령 A가 B에게 집을 인도하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천재지변으로 지진이 일어나 집이 무너져 파괴됐다. A는 더이상 집을 인도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게 된 것에 A는 아무 과실이 없다. 이런 경우 A는 채무불이행책임을 지지 않는다.

 

형사법에서는 고의범을 무겁게 처벌한다. 반면 과실범은 약하게 처벌하거나 처벌하지 않을 때도 많다. 예를 들어 형법은 과실 폭행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폭행은 고의범만 처벌한다. 그러나 민사법에서는 얄짤 없다. 고의이든 과실이든 채무자의 잘못으로 채무불이행을 하였다면 채무자는 그 책임을 진다(제390조). 그러니 채무자가 “난 고의가 아니라 과실로 채무불이행을 했을 뿐이에요”라고 항변해봤자, 민사법에서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채무자가 타인을 사용하여 이행하는 경우에는 그 피용자의 고의나 과실은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로 본다(제391조).[각주:1] 이런 피용자를 ‘이행보조자’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채무자에게는 아무런 과실이 없더라도 채무자를 도운 이행보조자들에게 과실이 있다면 채무자에게 과실이 있는 걸로 보겠다는 거다. 그러니 지붕수리업자 A가 지붕을 수리하기로 하였는데, 그 조수 B가 지붕을 깨뜨려 집주인에게 손해를 입혔더라도, B의 과실은 A의 과실로 인정된다. A는 자기의 돈으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채무자가 이행보조자의 행위까지 책임을 져야하는 까닭이 있다. 채무자는 이행보조자를 활용하였다. 자신의 행위영역을 넓혔다. 그만큼 이익을 얻었지만, 동시에 사회적 위험도 커졌다. 응당 그 행위영역에서 발생한 채무불이행에 따른 책임도 채무자가 져야 한다. 그것이 타당하다.

  1. 제391조(이행보조자의 고의, 과실) 채무자의 법정대리인이 채무자를 위하여 이행하거나 채무자가 타인을 사용하여 이행하는 경우에는 법정대리인 또는 피용자의 고의나 과실은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로 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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