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상계

칼린츠 2020. 1. 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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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계란 무엇인가

 

 

당신은 내게 10만원을 줘야하고, 나는 당신에게 10만원을 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해보자. 원래대로라면 당신과 나는 차근차근히 채무를 이행해야 한다. 당신은 내게 10만원을, 나는 당신에게 10만원을 쥐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번거롭다. 귀찮다. 서로 주고받아야할 10만원은 퉁치자. 서로가 지는 두 채무를 없애버리는 것이 간편하다. 이처럼 같은 종류의 채무를 지고 있는 두 사람은 그 채무를 같은 범위에서 없애버릴 수 있다. 이것이 상계(相計)이다.

 

상계를 하는 사람의 채권을 자동채권(自動債權), 그 상대방의 채권을 수동채권(受動債權)이라고 한다. 앞으로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이란 말을 많이 쓸 거다. 익숙하지 않으면 헷갈리기 쉽다. 스스로를 상계하는 사람의 입장에 대입해보자. 그나마 이해하기 쉽다.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상상해보자. 당신 앞에 상대방이 있다. 당신은 상계를 하려고 한다. 당신이 받을 돈은 10만 원이다. 줘야할 돈도 10만 원이다. 이때 당신이 상대방에게 1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채권'이 자동채권이다. 반면, 당신이 상대방에게 10만 원을 줘야하는 '채무'가 수동채권이다. 상계하는 사람 입장에서 자동채권은 채권이고, 수동채권은 채무다.

 

⑴ 상계는 간편한 결제방법이다. 채무자는 상계권을 행사해서 자신이 가진 채권과 채무를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빚을 청산한다. ⑵ 상계는 담보와 같은 기능도 한다. A가 B에게 10만 원을 지급할 채무가 있는 상황이다. 마침 A가 B에게 10만 원을 빌려 주었다. 이때 A는 "B가 나중에 10만 원을 안 갚으면 어쩌지?"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B가 돈을 안 갚더라도, A는 상계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B가 빚쟁이고, 수만명의 채권자들이 B에게 돈달라고 난리라고? 걱정하지 말라. 그래도 안심이다. A가 상계를 해버리면 B한테서 받아야 할 10만 원을 자신의 채무에 충당한다. 사실상 다른 채권자보다 우선변제받는 결과가 된다. 수동채권은 자동채권의 담보인 것이다.

 

 

 

2. 상계를 위해선 상계적상이 필요하다

 

제492조(상계의 요건) ①쌍방이 서로 같은 종류를 목적으로 한 채무를 부담한 경우에 그 쌍방의 채무의 이행기가 도래한 때에는 각 채무자는 대등액에 관하여 상계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이 상계를 허용하지 아니할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전항의 규정은 당사자가 다른 의사를 표시한 경우에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 의사표시로써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제493조(상계의 방법, 효과) ①상계는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한다. 이 의사표시에는 조건 또는 기한을 붙이지 못한다. ②상계의 의사표시는 각 채무가 상계할 수 있는 때에 대등액에 관하여 소멸한 것으로 본다.

 

상계를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상계의 요건이 갖춰져야 한다. 상계의 요건을 갖춘 상태를 상계적상(相計適狀)이라고 한다. 상계적상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⑴ 첫째, 상계를 하기 위해서는 채권과 채무가 같은 종류이어야 한다. 당신이 받을 것이 이천 쌀 50kg이고, 당신이 줘야할 것이 이천 쌀 30kg이라면 상계할 수 있다. 하지만 받을 것은 이천 쌀인데, 줘야할 것이 돈이라면 상계할 수 없다.

 

⑵ 둘째, 상계를 하려면 자동채권은 변제기가 되었어야 한다(제492조 제1항). 그러지 않으면 상대방은 아직 갚을 때가 아닌데도 변제를 강요당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반면 수동채권은 상계하려는 채무자 입장에서는 채무다. 그러니 수동채권은 아직 변제기가 아니어도 상계할 수 있다. 채무자가 변제기보다 더 빨리 갚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다.

 

⑶ 셋째, 상계를 하려면 채무가 상계를 허용할만한 성질이어야 한다(제492조 제1항 단서). 따라서 판례는 항변권이 부착된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삼아 상계할 수 없다고 한다.[각주:1] 왜냐? 상대방이 가진 항변권을 박탈하는 결과가 되니까.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A는 B에게 빌린 돈 100만 원을 갚아야 할 채무가 있고, B한테서 100만 원 매매대금을 받아야할 채권도 있다. 아직 A가 B에게 매매물건을 주지는 않은 상태다. 이때 A는 매매대금 채권으로 상계할 수 없다. B에게는 동시이행의 항변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A가 상계를 하지 않고, B에게 100만 원을 그냥 달라고 청구했다고 하자. B는 동시이행의 항변권을 행사하여 의무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A가 상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면, B는 아직 물건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매매대금만 먼저 지급하는 꼴이 된다. B는 동시이행의 항변권을 써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B에게 대단히 불리하다. 판례가 항변권이 부착된 채권으로 상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만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이 서로 동시이행관계에 있는 채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때는 판례도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을 서로 상계할 수 있다고 한다.[각주:2] 예컨대 A와 B가 매매계약을 맺었다가 계약을 해제했다. 이제 A는 B한테서 받은 매매대금을 돌려줘야할 채무를 지고, B는 A에게 그동안 매매목적물을 사용‧수익해 얻은 이익을 돌려줘야할 의무를 진다. 두 채무는 동시이행관계에 있다. 이때는 A이든 B이든 두 채무를 상계할 수 있다. 상계를 하면 두 채무는 동시에 사라진다. A와 B가 동시에 이행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상계가 동시이행의 항변권이 존재하는 목적을 배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목적을 더 잘 살려준다.

 

 

 

 

3. 주의 : 상계가 금지된다

 

상계적상을 갖추면 상계할 수 있다. 그런데 민법은 다음의 경우에는 상계적상을 갖추어도 상계할 수 없다고 한다.

 

⑴ 첫째, 당사자가 상계를 하지 말자고 합의한 경우에는 상계할 수 없다(제492조 제2항 본문). 사적자치 원칙에 따라 당사자가 합의를 금지하는 약정을 맺었다면 그 약정을 존중해야 한다. 다만 아무리 당사자가 상계금지 합의를 했더라도 그 합의를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제492조 제2항 단서). A와 B가 상계하지 말자는 약속을 했지만, C가 이런 약정을 모른 채로 A의 채권을 양수하였다면 C는 상계할 수 있는 것이다.

 

⑵ 둘째, “채무가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것인 때에는 그 채무자는 상계로 채권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제496조).” 법조문만 들어서는 뭔소린가 싶을 거다. 문장을 괜히 어렵게 써놨다. 제496조는 이런 말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면 손해배상책임을 지고, 돈으로 손해를 물어줘야 하는데,[각주:3] 이때 가해자는 그 손해배상책임을 면하려고 상계권을 행사할 수 없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직접 돈을 줘야지, 상계하자며 퉁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례] ⑴ 김씨는 이씨를 고의로 때렸다. 치료비로 500만원이 나왔다. ⑵ 맞은 이씨는 분했다. 이씨는 김씨 집을 찾아갔다. 준비했던 ‘정의의 야구망망이’를 꺼냈다. 흠씬 몽둥이 찜질을 했다. 김씨의 치료비도 500만원이 나왔다. ⑶ 이씨는 “내가 당신한테 받아야 할 치료비와 내가 당신에게 줘야할 치료비를 서로 상계하자”고 주장한다. 가능할까?

[해설] - 없다. 고의로 불법행위를 한 가해자는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채무를 수동채권으로 삼아 상계할 수 없다(제496조). 이씨도 김씨에게, 김씨도 이씨에게 치료비를 직접 줘야하지, 상계로 채무를 없애지는 못한다. 이처럼 불법행위 가해자가 상계할 수 있다고 허용하면 큰일 난다. 불법행위를 당한 사람은 가해자를 찾아가 보복행위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이제 새로운 가해자가 된다. 그는 '상계해버리지 뭐'라고 할 것이다. 제496조는 보복적 불법행위를 막기 위한 규정이기도 하다. 하나의 불법행위가 또다른 불법행위로 이어지는 일을 차단한다.

 

⑶ 셋째, “채권이 압류하지 못할 것인 때에는 그 채무자는 상계로 채권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제497조)”. 민사집행법이나 특별법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압류할 수 없다고 정한 채권이 있다. 생활에 꼭 필요한 채권이니 이것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법령에 규정된 부양료, 급여채권의 2분의 1 상당액, 근로자의 재해보상청구권, 형사보상청구권 등이 있다. 이런 돈은 채무자에게 직접 주어야지, 상계를 하자며 퉁쳐서는 안된다. 채무자가 당장 돈을 받지 못하면 생활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민법이 상계를 금지한다.

 

⑷ 넷째, “지급을 금지하는 명령을 받은 제삼채무자는 그 후에 취득한 채권에 의한 상계로 그 명령을 신청한 채권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제498조).” 지급금지명령이란 압류나 가압류를 말한다. 채권자가 채무자의 채권을 압류했다고 하자. 제3채무자가 나중에 취득한 채권으로 상계를 하는 것을 허용하면, 채권자가 애써 압류를 한 채권이 사라진다. 그래서 제498조는 제3채무자가 지급금지명령을 받은 뒤에 취득한 채권으로 상계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제3채무자가 멀쩡히 채무자에 대한 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채권자가 압류를 하였다고 해서 상계를 금지하는 것도 부당하다. 제3채무자가 “난 나중에 상계를 할거야”라고 한 기대도 보호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498조는 제3채무자가 지급금지명령을 받은 ‘후’에 취득한 채권으로 상계할 수 없다고만 할 뿐이다. 지급금지명령을 받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채권으로는 상계할 수 있다. 다만, 판례는 제3채무자가 지급금지명령을 받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채권이라고 할지라도, 그 변제기가 피압류채권(수동채권)의 변제기와 같거나 그보다는 빨라야 상계가 가능하다고 한다. 변제기를 기준으로 압류채권자와 제3채무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각주:4] 

 

 

 

  1. 대법원 1969. 10. 28. 선고 69다1084 판결, 대법원 1975. 10. 21. 75다48 판결, 대법원 2001. 11. 13. 선고 2001다55222, 55239 판결 등 [본문으로]
  2. 대법원 2006. 7. 28. 선고 2004다54633 판결 [본문으로]
  3. 제750조(불법행위의 내용)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본문으로]
  4. 대법원 2012.02.16. 선고 2011다45521 전원합의체 판결은 "민법 제498조는 “지급을 금지하는 명령을 받은 제3채무자는 그 후에 취득한 채권에 의한 상계로 그 명령을 신청한 채권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위 규정의 취지, 상계제도의 목적 및 기능, 채무자의 채권이 압류된 경우 관련 당사자들의 이익상황 등에 비추어 보면, 채권압류명령 또는 채권가압류명령(이하 채권압류명령의 경우만을 두고 논의하기로 한다)을 받은 제3채무자가 압류채무자에 대한 반대채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상계로써 압류채권자에게 대항하기 위하여는, 압류의 효력 발생 당시에 대립하는 양 채권이 상계적상에 있거나, 그 당시 반대채권(자동채권)의 변제기가 도래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것이 피압류채권(수동채권)의 변제기와 동시에 또는 그보다 먼저 도래하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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