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변제와 변제자대위

칼린츠 2020. 1. 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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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입문:계약법] 변제와 변제자대위

 

 

변제와 동시에 채권은 죽는다

 

변제는 채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돈을 빌린 사람은 돈을 갚는다. 고용계약을 맺은 사람은 일을 한다. 공사를 해주기로 약정한 사람은 공사를 끝마친다. 이것이 변제다. 이렇게 채무를 이행하면 채권은 목적을 달성한다. 목적을 달성한 채권은 소멸한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한테 돈을 받기로 했다. 나는 당신한테서 약속했던 금액을 다 받았다. 이제 내가 돈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채권은 변제로 없어진다. 내게 더이상 채권이 없으니, 당신한테 돈을 또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변제는 채권의 소멸원인이다. 채권은 변제로 최고의 만족을 얻지만 그와 동시에 소멸한다. 인생의 절정기에 죽는 셈이다. 야릇하다. 변제에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구나. 

 

 

 

변제장소

 

변제장소는 채무의 성질이나 당사자의 약정으로 정한다.[각주:1] 당사자가 "날도 좋은데, 한강둔치에서 만나 물건을 교환하자"라고 약속했다고 하자. 변제장소는 약속한대로다. 한강둔치다. 당사자가 좋단다.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다. 

 

당사자가 변제장소를 따로 약속하지 않았다면? 그땐 민법이 정한 내용에 따른다. 특정물을 인도해야할 때는 채권성립 당시에 그 물건이 있던 장소에서 변제한다. 다른 채무는 채권자의 현주소나 현영업소에서 변제한다.[각주:2] 

 

여기서 '특정물'을 인도해야하는 의무는 무엇을 말할까. 당사자가 '바로 그 물건'을 인도해야 하는 의무를 말한다. A가 B에게 자기 집에 있는 고려청자 1개를 인도하기로 했다. A는 자기 집에 있는 '바로 그 고려청자'를 인도해야한다. 엉뚱하게 옆집에 사는 고길동의 도자기를 넘겨주어선 안 된다. 이런 게 특정물 인도의무다. A가 B와 계약을 맺을 때 고려청자는 A의 집에 있었다. 두 사람이 변제장소를 따로 정한 게 없다면, A의 집이 변제장소다. B가 직접 A의 집으로 와서 고려청자를 받아가야 한다. 채권자가 직접 추심하러 와야하므로 '추심채무'라 부른다. 

 

반면, A가 빌린 돈 500만원을 갚아야 한다고 해보자. 아무 돈이든 500만원 금액만 맞춰 건네주면 상관없다. 이것은 특정물 인도의무가 아니다. 그러니 당사자가 별다른 약정을 하지 않았다면 변제장소는 채권자의 현주소나 현영업소다. A는 500만원을 마련해서 B의 집에 찾아가서 변제해야 한다. 채무자가 물건을 지참하여 변제하러 가야하므로 '지참채무'라 부른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변제장소는 당사자들의 약정이나 채무의 성질로 정할 수 있으면 그에 따라 정한다. 그걸로 정할 수가 없으면 채무자가 특정물을 인도해야 하는 경우 채무가 성립할 때 그 특정물이 있었던 장소에서 변제한다. 주로 채무자가 특정물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채권자가 직접 특정물이 있는 곳으로 와서 특정물을 받아가야 할 게다(이른바 추심채무’). 나머지 채무를 이행할 때는 채무자가 직접 채권자가 살거나 일하는 곳을 찾아가 변제하면 된다(이른바 지참채무’).

 

 

 

변제시기

 

채무를 이행하기로 한 날을 변제기(辨濟期) 또는 이행기(履行期)라고 부른다. 돈을 갚기로 한 날, 매매대금을 주기로 한 날, 물건을 인도하기로 한 날 등을 말한다. 제때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채무불이행 책임을 진다(그 중에서 이행지체). 그러니 변제기를 잘 지키자. 

 

변제기 전에도 채무를 이행할 수 있을까? 당사자가 이걸 금지하는 약정을 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채무자가 빨리 변제하는 바람에 채권자가 손해를 입었다면 채무자는 그 손해를 물어줘야한다.[각주:3]

 

예를 들어 AB한테서 300만원을 빌렸다. 이자를 월 5%로 했고, 1년 후에 갚겠다고 했다. 이때 A는 아직 1년이 아니라 3개월밖에 안지났어도 300만원을 갚아버릴 수 있다. 물론 A가 돈을 일찍 갚아버리면 짭잘한 이자수입을 기대하던 B는 손해를 입는다. A는 돈을 빨리 갚는 대신 B가 얻을 수 있었던 이자에 해당하는 돈만큼은 배상해야 한다.

 

 

 

제3자의 변제와 변제자대위

 

⑴ 제3자의 변제 

 

반드시 채무자만이 채무를 이행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469조 제1항 단서). 첫째는 채무자 당신이 꼭 이행해주세요라고 두 사람이 약속한 경우다. 이럴 때는 곧죽어도 채무자가 해야 한다. 둘째는 채무의 성질상 채무자만이 채무를 이행해야 하는 경우이다. 당신이 생일파티에 가수 나훈아를 불렀는데, 엉뚱하게 너훈아가 왔다고 하자. 이건 정당한 채무이행이 아니다. 이처럼 채무의 성질상 반드시 그 채무자가 이행해야하는 급부를 일신전속적인 급부라고 부른다.[각주:4]

 

두 가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누가 채무를 이행하든 별 상관이 없다. 가령 빌려준 돈을 받을 때를 생각해보자. 채무자가 돈을 주든, 채무자의 친구가 대신 갚아주든 채권자한테 뭔 대수란 말인가. 그냥 돈만 받으면 된다. 따라서 당사자의 약정이나 채무의 성질로 제3자가 변제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만 아니라면, 채무자가 아닌 제3자도 얼마든지 변제할 수 있다. (다만, 민법은 이해관계 없는 제3자가 채무자가 싫다는데도 억지로 그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는 것까지는 금지한다(469조 제2).[각주:5])

 

제3자가 채무자의 채무를 대신 변제하면 제3자는 채무자에게 상환하라고 청구할 수 있다. 이런 권리를 구상권(求償權)이라고 한다. 민법은 '불가분채무자, 연대채무자, 보증인이 변제한 때 다른 불가분채무자, 연대채무자, 주채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제411조, 제425조 이하, 제441조 이하). 예컨대 보증인이 주채무자가 지는 빚을 대신 갚으면 주채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꼭 민법에 규정이 없는 관계에서도 구상권은 성립할 수 있다. 어쨌든 제3자가 남의 채무를 대신 갚았으니, 그 채무자한테서 보상을 받아야 한다. 만약 제3자가 채무자의 부탁을 받아 변제했다면 위임사무처리비용의 상환청구권에 기하여 구상권을 얻는다(제688조). 사무관리 요건을 충족한다면 사무관리비용의 상환청구권에 기하여 구상권을 갖는다(제739조). 사무관리조차 안된다면 부당이득반환청구권에 기하여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제741조).  

 

 

⑵ 변제자대위

 

아래 그림을 보자. 민수는 영희에게 1억 원의 빚을 졌다. 그런데 민수가 진 빚을, 철수가 대신 갚았다. 철수는 이제 민수에게 1억 원을 달라는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채무자가 변제자에게 구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을 위험이 있다. 그래서 마련한 제도가 변제자대위이다. 변제자대위란 채무자를 위하여 변제한 사람이 채권자의 채권과 그 채권에 관한 권리(이행청구권, 손해배상청구권, 채권자대위권, 각종 담보권)를 구상권 범위 안에서 취득하는 것이다(480, 481).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철수가 변제자대위를 한다면, 영희가 가졌던 저당권은 철수에게 이전한다. 만약 철수가 민수한테서 구상금을 받지 못하면, 저당권을 실행하면 된다. 구상권이 더 확실히 보장된다. 

 

 

물론 아무나 변제자대위를 할 수는 없다. 요건이 필요하다.

 

① 첫째, 변제할 변제할 정당한 이익이 있는 사람은 변제하는 것만으로 채권자의 권리를 취득할 수 있다(법정대위, 481). 여기서 변제할 정당한 이익이 있는 사람이란 채무자가 변제를 하지 않으면 자기한테 법적인 불이익이 돌아오는 사람을 말한다. 사실상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자는 포함되지 않는다.[각주:6]

 

보증인이나 물상보증인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위 [그림]에서 철수가 민수의 보증인이라고 하자. 만약 민수가 돈을 안 갚으면 철수가 돈을 갚아야 한다. 민수가 계속 채무이행을 미루면 철수도 영희한테서 강제집행을 당할 수 있다. 그러니 철수는 민수가 변제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입고, 그 불이익은 법적인 불이익이다. 변제할 정당한 이익이 있다. 그러므로 철수가 영희에게 돈을 갚으면 변제자대위로 영희가 가진 저당권을 이전받는다. 

 

둘째, 변제할 정당한 이익이 없는 사람이 변제하였다면 채권자의 승낙을 얻어야 변제자대위를 할 수 있다(임의대위, 480). 철수가 민수와는 아무런 법률관계가 없지만 그저 민수가 불쌍하여 대신 채무를 갚아주었다면, 철수는 영희한테서 '저당권을 이전한다'는 허락을 받아야만 저당권을 취득하는 것이다. 

 

이때 채무자는 채권자가 변제자대위 승낙을 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민법은 지명채권 양도의 대항요건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각주:7] 그러므로 변제자가 채권자의 승낙을 받았더라도, 채권자가 승낙한 사실을 채무자에게 통지하거나 채무자가 변제자대위를 승낙하여야 변제자가 변제자대위를 채무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채권양도 부분에서 설명한다.)

 

 

⑶ 변제자 일부대위

제483조(일부의 대위) ①채권의 일부에 대하여 대위변제가 있는 때에는 대위자는 그 변제한 가액에 비례하여 채권자와 함께 그 권리를 행사한다. 

대위자가 변제자대위를 하면 채권자의 채권과 담보권은 대위자에게 넘어간다. 위 [그림]으로 말하자면, 철수는 이제 영희의 채권과 저당권을 취득한다. 만약 철수가 민수한테서 구상금을 받지 못한다면 저당권을 실행할 수 있다. 

 

그런데 철수가 1억 원을 전부 변제하지 않고, 5천만 원만 변제하면 어떻게 될까? 민법 제483조는 대위자가 채권 일부만 변제했을 때는 "그 변제한 가액에 비례하여 채권자와 함께 그 권리를 행사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니 철수는 영희의 저당권 전부가 아니라 변제한 가액에 비례하여 저당권의 절반만 취득할 수 있다. 철수는 영희에게 저당권 일부이전의 부기등기만 청구할 수 있다.[각주:8]

문제는 채권자와 일부 변제자의 관계다. 철수와 영희는 저당권을 반쪽씩 나누어 가졌다. 저당권 실행 후 매각대금은 철수와 영희가 어떤 비율로 나눠가져야할까? 절반씩 나눠가지면 공평할까? 판례와 통설은 '채권자가 일부 대위변제자에 우선하여 배당받아야 한다'고 본다. 민수 집이 팔려서 8천만 원의 배당금이 생겼다면, 일단 영희가 5천만 원을 다 받아가고, 남은 3천만 원을 철수가 받는다는 것이다.[각주:9] 

 

판례와 통설이 이렇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제3자가 대위변제를 하고 그 구상권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더라도, 변제자대위로 채권자의 이익까지 해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희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영희는 그저 1억 원의 채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철수가 나타나 채무자를 대신하여 변제했다. 이걸 이유로 경매 매각대금을 철수와 반씩 나눠가져야 한다면 불합리하다. 영희는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단지 제3자가 변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익을 침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제467조 제1항 [본문으로]
  2. 467조 제1, 2[본문으로]
  3. 제468조(변제기전의 변제) 당사자의 특별한 의사표시가 없으면 변제기전이라도 채무자는 변제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손해는 배상하여야 한다. [본문으로]
  4. 제469조(제삼자의 변제) ①채무의 변제는 제삼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삼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본문으로]
  5. 제469조(제삼자의 변제) ②이해관계없는 제삼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 [본문으로]
  6. 대법원 2009. 5. 28.자 2008마109 결정 등 [본문으로]
  7. 제480조(변제자의 임의대위) ①채무자를 위하여 변제한 자는 변제와 동시에 채권자의 승낙을 얻어 채권자를 대위할 수 있다. ②전항의 경우에 제450조 내지 제452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본문으로]
  8. 다만, 대법원 2011.06.10. 선고 2011다9013 판결은 변제자대위로 대위자는 권리를 당연취득하므로 근저당권 일부 이전의 부기등기가 없더라도 채권자가 가지고 있던 채권과 담보권을 당연취득한다고 했다. 즉, "변제할 정당한 이익이 있는 사람이 채무자를 위하여 근저당권의 피담보채무의 일부를 대위변제한 경우에는 대위변제자는 근저당권 일부 이전의 부기등기의 경료 여부에 관계없이 변제한 가액의 범위 내에서 채권자가 가지고 있던 채권 및 담보에 관한 권리를 법률상 당연히 취득한다."고 판시했다. [본문으로]
  9. 대법원 2004. 6. 25. 선고 2001다2426 판결 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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