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변제제공, 채권자지체

칼린츠 2020. 1. 1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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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자가 변제받기를 거절할 때는 어찌해야하나

 

변제는 채무자만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채무자가 빌린 돈을 되돌려주고, 인도하기로 한 물건을 제때 넘겨주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채무자가 돈이나 물건을 주려면 일단 채권자가 그걸 받아야 한다. 채무자는 주려고 애쓰는데, 채권자가 도망다니면서 변제받기를 거부한다면 채무자로서 변제를 할 수 없다. 의사가 손님을 치료하려면 손님은 자기 신체를 내보여야 하고, 정원사가 고객의 정원을 손질하려면 고객이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줘야 한다. 이처럼 오직 채무자 혼자 변제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채권자가 도와주어야 한다.

 

만약 채권자가 도와주지 않아 채무자가 변제를 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령 A와 B가 매매계약을 맺었다고 해보자. 이제 A는 B에게 제품을 인도해야할 의무를 진다. A는 B에게 약속한 날 제품을 들고 B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B가 집에 없었다. 제품을 주지 못했다. A는 할일을 다했지만 B가 도와주지 않아 변제를 못한 것이다. 이처럼 민법은 채무자가 변제제공 행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채무자를 기특하게 여겨 일정한 혜택을 준다. 이것이 '변제제공의 효과(406)’이다. 동시에 채권자에게는 일정한 불이익을 준다. 이것이 채권자지체(400)’이다

(위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쌍무계약에서 A도, B도 의무를 진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채무자이기도 하고 채권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설명하는 채무자는 '변제제공을 하려는' 채무자를 말한다. 지금 변제제공을 하려는 사람은 A이므로 A를 '채무자'로 부르고, 그 상대방인 B를 채권자라고 부르겠다. 쌍무계약관계에 있는 B가 지는 채무를 반대채무라고 부른다.)

 

 

 

변제제공만으로도 혜택이 발생한다

 

가. 변제제공의 효과

제461조(변제제공의 효과) 변제의 제공은 그때로부터 채무불이행의 책임을 면하게 한다.

먼저 채무자가 변제제공을 다하면 얻는 혜택을 알아보자.

 

⑴ 제461조에 따르면, A는 변제제공을 한 것만으로 이제부터 채무불이행책임을 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채무불이행책임은 이행지체책임을 말한다(다수설, 채무불이행 유형은 나중에 설명한다). 그러니 A가 변제제공을 한 다음부터는 지연손해금을 물지 않는다. A가 변제기를 넘겼다고 하여 B가 이걸 문제삼아 계약을 해제할 수도 없다.[각주:1]

 

A가 변제제공을 하면 상대방 B가 가진 동시이행의 항변권은 소멸한다. 동시이행의 항변권은 "상대방이 그 채무이행을 제공할 때까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536조 제1).[각주:2] 다만, 판례는 "이행의 제공이 계속되지 않는 한 과거에 이행의 제공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당사자 일방이 가진 동시이행의 항변권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각주:3] 동시이행의 항변권을 소멸시키려면 이행제공을 잠깐해서는 부족하고, 쭉 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동시이행의 항변권은 이행제공이 계속되는 기간만큼만 소멸하게 된다.

 

동시이행의 항변권이 있으면 이행지체에 빠지지 않으므로, 동시이행의 항변권이 소멸해야 이행지체에 빠진다. AB에게 제품을 배달하여 그 집 앞에 계속 놔두고 있는 동안은 이행제공이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간동안 B는 대금지급 의무를 지체한 이행지체 책임을 진다. B는 그 기간동안의 지연손해금을 물어내야 한다. 그러나 A가 이 제품을 거두어 갔다면 이행제공은 중단된다. B가 가진 동시이행의 항변권은 부활한다. 이제 B는 이행지체책임을 지지 않는다.[각주:4][각주:5]

 

 

 

나. 변제제공의 유형

제460조(변제제공의 방법) 변제는 채무내용에 좇은 현실제공으로 이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채권자가 미리 변제받기를 거절하거나 채무의 이행에 채권자의 행위를 요하는 경우에는 변제준비의 완료를 통지하고 그 수령을 최고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채무자가 어떤 행위를 해야 변제제공을 한 효과를 받을 수 있을까.

 

⑴ 원칙적으로 현실제공(現實提供)이어야 한다(460조 본문). 채무자는 자신이 해야할 몫을 현실적으로 다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소리다. 건물소유권을 양도하기로 한 사람은 등기서류를 들고 약속장소로 나가야 한다. 돈을 주기로 한 사람은 돈을 들고 약속장소에서 지급할 상태로 있어야 한다. 변제제공은 말로만 때울 수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채무자가 변제준비 정도만 하고, 변제준비가 다 됐다는 걸 알리고 어서 변제받으라고 재촉하는 것만으로도 변제제공을 다하였다고 인정받을 때가 있다. 이런 변제제공 방법을 구두제공(口頭提供)이라고 한다(460조 단서). 구두제공으로도 충분한 경우는 두가지다.

 

첫째, 채권자가 미리 변제받기를 거절한 경우이다. B가 아무 이유 없이 만나기로 약속한 날을 늦추거나 계약을 해제하자고 한다. B가 이렇게 나오는데, A가 시간과 돈을 들여 직접 현실제공해야할 필요가 없다. 이럴 때는 구두제공만해도 괜찮다고 봐줘야 한다.

 

둘째,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채권자의 사전적인 협력이 필요한데, 채권자가 아무런 협력을 안하여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가령 ‘B가 쇠와 나무를 주면 A는 칼을 만들어 공급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A가 칼을 만들어주려면 일단 B가 재료를 줘야 한다. 그런데 B는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재료를 안준다. A가 현실제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이럴 때도 A가 구두제공만 하면 충분하다. "나는 칼을 만들어 공급할 준비를 다했으니, 어서 변제받아가시오~"라고 통지하면 변제제공을 다한 것이다.

 

더 나아가 판례는 구두제공조차 필요없는 경우를 인정한다. 대법원 1995.04.28. 선고 94다16083 판결 사안이다. 부동산 매수인이 잔대금 지급의무를 이행하고 소유권이전등기를 넘겨받을 의사가 없다는 것을 미리 표시했다. 그 의사표시가 아주 확고부동했다. 번복할 가능성이 없었다. 이 사안에서 대법원은 매수인을 이행지체에 빠뜨리기 위하여 매도인이 구두제공을 할 필요조차 없다고 했다. 채권자가 변제받지 않겠다는 의사가 확고해서, 나중에 그 의사를 번복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면, 채무자가 구두제공조차 하지 않아도 채권자는 이행지체에 빠지고, 채무자는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거다. 단호한 판례다. 하긴, 채권자가 변제를 안받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채무자가 굳이 구두제공을 하며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는 없다.

 

 

 

다. 변제공탁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변제제공과 변제는 다르다. 채무자가 노력하여 변제제공을 하였지만, 채권자가 제대로 도와주지 않아 변제에는 이르지 않았더라도, 변제는 변제고 변제제공으 변제제공이다. 가령, A가 B에게 제품을 보내줬지만 B가 집에 없어서 제품을 받지 못하였을 때, 어쨌든 A가 변제를 하지는 못했으므로 A는 '변제제공'의 효과만 받는다. '변제'의 효과는 발생하지 않는다. A가 부담하던 채무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A는 여전히 제품을 인도할 의무를 진다.

 

이때 채무자가 의무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변제공탁이란 방법이 있다. 변제공탁은 채권자가 변제를 받지 않거나, 변제를 받을 수 없거나, 채무자가 채권자를 알 수 없는 경우에 채무자가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487). 이 세 경우에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직접 변제하는 대신 공탁소에 변제할 물건을 맡겨놓을 수 있다. 변제공탁을 하면 채권자에게 변제한 것과 똑같은 효과가 생긴다. 채무자는 채무에서 비로소 해방된다.

 

 

 

채권자에게 주는 패널티, 채권자지체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협력하지 않거나 협력할 수 없어서 채무자가 변제를 못했다면 채권자는 채권자지체에 빠진다. 채권자가 돕지 않았으니 채권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불이익이 생긴다.

 

첫째, 채권자가 채권자지체에 빠지면 채무자에게 고의나 중과실이 있을 때만 이행불능책임을 물을 수 있다(401). 채무자에게 오직 경과실만 있다면 이행불능책임을 묻지 못한다. B가 약속을 깜박 잊고 집에 없어 A한테서 제품을 수령하지 못했다. 이때 B는 채권자지체에 빠진다. 이제 B는 A의 경과실로 이행불능 사태가 일어나 제품을 받지 못하더라도 채무불이행책임을 묻지 못한다. 예컨대, A가 그 제품을 보관하다가 경과실로 그 제품을 깨뜨렸다. A의 채무는 이행불능이 되었지만, B는 A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계약을 해제할 수도 없다.

 

⑵ 둘째, 채권자가 채권자지체에 빠지면 채무자가 지던 대가위험은 이제 채권자가 부담한다. '위험부담'이라는 말이 나오면 아직도 아리송하지? 기억을 되짚어보자. 쌍무계약의 특성은 뭐다? '너가 안주면 나도 안준다'는 거다. 따라서 AB에게 부담하는 채무가 쌍방의 책임 없는 사유로 이행불능이 되었다면, BA에게 채무를 이행할 필요가 없다. BA한테서 제품을 받을 수 없으니, A에게 돈을 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걸 원칙적으로 대가위험은 채무자가 진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채권자 B가 채권자지체 중이라면 반전이 일어난다. 대가위험이 채권자에게 넘어간다. B가 제품을 수령하지 않아 채권자지체에 빠지고, A가 제품을 보관하다가 불가항력적인 사유로 제품이 깨졌다. 이제 A의 인도의무는 이행불능이 된다. BA한테서 제품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B는 돈을 줘야 한다. 어때? 상당히 가혹하지?

 

앞서, 채권자가 변제를 받지 않을 의사를 바뀔 가능성 없이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면 채무자는 구두제공조차 하지 않더라도 변제제공의 혜택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채권자지체 효과 중에서 대가위험을 채권자가 부담하는 것만큼은 채권자에게 불이익이 너무 크다. 그래서 판례는 채권자의 수령지체 중에 당사자 쌍방의 책임없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채무자가 현실제공이나 구두제공만큼은 해야한다고 판시한다.[각주:6]. 아무리 채권자의 수령거절의사가 확고하더라도, 채권자에게 위험을 부담시키려면 채무자는 적어도 구두제공만큼은 해야한다는 것이다.

 

⑶ 셋째, 채권자는 채권자지체 중이라면 채무자에게 이자를 달라고 할 수 없다(402).

 

⑷ 넷째, 채권자가 수령거절 등 협력을 하지 않아 그 목적물의 보관비용이나 변제비용이 늘어났다면 그 증가한 만큼을 채무자에게 상환해야 한다(403). , 비용증가분을 채권자가 부담한다.

 

 

 

[사례]
김씨(매도인)는 이씨(매수인)에게 자신의 중고노트북을 30만원에 팔기로 했다. 김씨는 약속한대로 노트북을 들고 이씨의 집에 갔다. 그러나 이씨가 집에 없었다. 노트북을 줄 수 없었다. 김씨는 되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에 부딪혀서 사고가 났다. 김씨가 들고 있던 노트북이 산산조각났다. 차 사고가 난 데에는 김씨의 과실(경과실)도 있었다. 김씨가 주변을 잘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⑴ 이씨는 김씨한테 노트북을 받지 못했다. 그는 “당신의 잘못으로 내가 노트북을 못 받게 되었으니 손해배상을 해주시오”라고 요구한다. 가능할까?
⑵ 김씨는 이씨에게 “내가 노트북을 줄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신은 내게 노트북 값 30만원을 주시오”라고 요구한다. 가능할까?

[해설 - ⑴문제]
① 변제제공은 현실제공이 원칙이다(제460조 본문). 김씨는 이씨의 집에 노트북을 들고 찾아갔으니, 김씨는 현실공을 했다. 그러나 아직 이씨가 노트북을 받은 것은 아니므로, 변제를 다 마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김씨는 이씨에게 노트북을 주어야 하는 채무를 진다.
② 김씨가 변제를 못한 까닭은 이씨가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할 일을 다했고, 이씨가 변제를 위해 도울 일 했다. 이씨는 채권자지체에 빠진다(제400조).
③ 채권자지체에 빠졌을 때에는 채무자가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있 에만 채무불이행책임(이행불능책임)을 진다(제401조). 김씨가 노트북을 못주게 되었지만, 경과실만 있을 뿐이다. 김씨는 채무불이행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씨에게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
[해설 - ⑵문제]
① 채권자의 수령지체 중에 당사자 쌍방의 책임없는 사유로 채무자가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반대급부를 청구할 수 있다(제538조 제1항). 다수설은 채권자가 채권자지체에 빠졌을 때에는 채무자가 경과실이 있어도 채무불이행책임을 지지 않으니, 채무자의 경과실로 이행불능이 되었을 때는 제538조의 ‘당사자 쌍방의 책임 없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
② 그러므로 김씨의 경과실로 노트북을 양도해야 하는 채무가 이행불능이 됐지만, 이때도 제538조를 적용한다. 김씨는 이씨에게 “노트북 값 30만원을 달라”고 할 수 있다.

 

  1. 제461조로 면하는 채무불이행책임은 '이행지체책임'이므로 A가 단순히 변제기를 넘겨 이행지체에 빠진 것이 아니라, 아예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겨 이행불능에 빠지고 말았다면 이행불능책임은 져야한다. [본문으로]
  2. 제536조(동시이행의 항변권) ①쌍무계약의 당사자 일방은 상대방이 그 채무이행을 제공할 때 까지 자기의 채무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채무가 변제기에 있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본문으로]
  3. 대법원 1966. 9. 20. 선고 661174 판결, 대법원 1972. 11. 14. 선고 721513, 1514 판결 등 [본문으로]
  4. 대법원 1995. 3. 14. 선고 9426646 판결 [본문으로]
  5. 반면, 해제권은 조금 다르다. 대법원은 상대방을 한번 이행지체에 빠뜨린 경우 계약해제를 위해서는 이행의 제공이 계속될 필요가 없고, 다만 신의칙상 최고기간동안 상대방의 이행을 수령하고 자신의 채무를 이행할 수 있는 정도의 준비는 해야한다고 판시한다,(대법원 1996. 11. 26. 선고 96다35590,35606 판결). 계약해제권은 이행지체가 성립하는 그 한 순간 발생하는데 반해, 이행지체에 따른 지연손해금은 이행지체 상태가 지속되는 기간만큼만 성립하기 때문인 것 같다. [본문으로]
  6. 대법원 2004. 3. 12. 선고 200179013 판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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