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민법의 기본이념과 계약법의 기본이념

칼린츠 2019. 9. 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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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의 대원칙 : 사적 자치의 원칙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민중은 튀를리궁으로 진격했다. 튀를리궁에는 국왕 루이 16세가 있었다. 스위스 용병과 근위대가 그를 호위하고 있었지만 성난 민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국왕의 병사들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혁명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이윽고 국왕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사형이 결정됐다. 루이 16세는 혁명 광장 중앙으로 끌려왔다. 기요틴의 칼날은 날카로웠다. 칼날은 루이 16세의 목에 떨어졌다. 집행관은 관중을 향해 루이 16세의 목을 들어보였다. 환호성이 터졌다. 1793년 1월 21일이었다.

 

중세 봉건질서가 무너지며 근대 법체계가 등장했다. 중세 봉건사회는 신분제 사회였다. 국가는 모든 구성원에게 신분을 주었다. 구성원은 그 신분에 알맞는 역할을 수행했다. 신분은 법률관계도 결정했다. 가령 토지를 누가 소유하고, 누가 이용할 것인가.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이걸 정하려고 복덕방에 가서 땅주인과 계약서를 쓴다. 그러나 봉건시대는 다르다. 신분에는 귀천이 있다. 내가 영주로 태어나면 토지를 소유한다. 농민으로 태어나면 그 토지를 뼈 빠지게 경작한다. 나의 법률관계를 내가 정하지 않는다. 신분제라는 시스템이 알아서 결정한다.

 

뿐만 아니다. 봉건시대는 법률관계와 인격적 관계가 분리되지 않았다. 오늘날 땅주인이 임차인에게 "내가 땅주인인데요. 내 심부름 좀 해주세요."라고 하다간, 어렵지 않게 싸대기를 맞을 수 있다. 그러나 봉건시대는 사정이 달랐다. 신분제는 자유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등하지도 않았다. 농민과 영주의 관계는 단순한 법률관계가 아니었다. 까라면 까야했다. 농민은 영주에게 인격적으로 종속됐다.

 

 

 

근대가 등장하며 위와 같은 신분제는 붕괴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근대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외쳤다. 개인은 한낱 권리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성의 힘으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 만인의 인격적 가치도 똑같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도 사람 없다. 국가는 마음대로 어떤 사람의 신분과 역할을 결정해선 안 된다.

 

이런 자유주의적 사상을 토양으로 삼아 근대 민법이 꽃을 피웠다. 민법이란 무엇인가. 법에는 크게 세 분야가 있다. 공법, 형사법, 민사법이다.

 

  • 1) 공법은 국가 조직끼리 관계나 국가 조직과 개인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가령 국회와 행정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 국민이 국가에게 주장할 수 있는 기본권은 무엇인지와 같은 문제를 다룬다. 헌법, 행정법이 여기에 속한다.
  • 2) 형사법은 범죄자를 처벌하는 문제를 다룬다. 무엇이 범죄고, 수사는 어떤 절차로 진행해야하는지 등을 다룬다. 형법, 형사소송법, 성폭력처벌법, 폭력행위처벌법 등이 대표적인 형사법이다.
  • 3) 민사법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문제를 다룬다. 주로 재산문제나 가족관계 문제다. 개인끼리 계약을 맺고, 부동산을 이용하고, 증여를 하거나 상속을 받는 문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민사법에는 부동산실명법, 부동산 등기법, 이자제한법, 실화책임법 등이 민사법 영역에 속한다. 민법은 이 광대한 민사법 영역의 가장 '큰 형님'쯤 되신다. 최고 일반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법은 모든 민사법 영역에 적용한다. (다만, 구체적인 영역을 다루는 특별법이 있을 수 있다. 그때는 그 특별법이 규율하는 영역에 한하여 해당 특별법을 민법에 우선적용한다.)

 

 

이렇게 민법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법률관계를 다룬다. 평등한 개인들과 관계를 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원리는 뭐니뭐니해도 ‘사적자치(私的自治)의 원칙’이다. 사적자치란 개인의 사적 생활 영역은 국가가 왈가왈부하지 말고 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의 사적 생활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자기결정). 다른 권위가 아니라 자신이 내린 그 결정에 의해서만 지배를 받아야 한다(자기지배). 그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응당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자기책임). 근대 이후 민법은 사적자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급적 계약을 자유롭게 체결할 수 있도록 도왔다(계약 자유). 개인이 가진 재산을 침해하지 않으려 했다(재산권 존중). 개인의 행동으로 어떤 잘못된 결과가 일어났더라도, 그 결과발생에 과실이 있을 때에만 책임을 지도록 했다(과실책임).

 

 

 

계약법의 기본원칙 : 계약자유의 원칙

 

법 제10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재화를 분배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국가주도형이다. 국가나 당이 경제계획을 세우고, 국민에게 재화와 일자리를 나눠주는 방법이다. 한때는 대략 지구상의 절반정도 되는 나라가 이 사회적 실험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성과가 시원찮았다. 경제예측은 종종 현실과 어긋났다. 필요한 물건은 늘 부족했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늘 남아돌았다. 국민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 상점 앞에서 줄을 서야했다. 그 줄은 길고도 길었다. 점차 체제의 비효율성이 누적됐다. 결국 이 운영방식은 몰락했다.

 

둘째는 개인주도형이다. 개인이 스스로 필요한 재화를 조달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계약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참고용 책들이 필요했다. 그걸 사자니 돈이 부족했다. 그동안 변호사시험 준비를 위해 보던 책들을 인터넷 중고시장에 올렸다. 아끼던 책을 처분하자니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러나 내 통장에 입금된 돈을 보자, 눈가헤 흐르던 눈물은 입가의 미소로 번졌다. 재미있게도 거래에 만족한 사람은 돈을 받은 나만이 아니다. 상대방도 내게 "감사합니다"하며 책을 받아갔다.

 

책을 파는 사람은 책을 최대한 비싸게 팔고 싶어한다. 책을 사는 사람은 가급적 싸게 사고 싶어한다. 모두 자신의 입장만 고수한다면 거래는 성사될 수 없다. 각자 자신의 욕심을 조금씩 버려야 한다. “아저씨 이거 조금만 깎아주시면 안돼요?”, “선생님, 이거 사시면 한 권 더 드릴게요.”와 같이 때로는 흥정도 해야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게 된다. 모두 흡족한 마음으로 거래결과를 받아들이는 기적이 일어난 건 이런 까닭이다. 계약은 재화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분배한다.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계약은 사적자치 원칙에 부합하기도 한다. 책을 팔기로 한 사람은 나다(자기결정). 내가 상대방에게 책을 주게 된 것은 내가 내린 그 결정에 따른 결과다(자기지배). 만약 책에 하자가 있다면 내가 책임져야할 것이다(자기책임). 국가가 너는 이 책을 만들고, 너는 이걸 받아가라고 강요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계약을 준비하고, 체결하고, 이행하는 과정 동안, 나는 내 삶의 주체가 된다.

 

아니, 이렇게 좋은 수단이 있다니. 그러므로 계약의 자유를 더욱 북돋워야 한다. 헌법 제10조를 읽어보자.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 즉 행복추구권을 갖는다. 이 행복추구권에서 계약의 자유가 도출된다. 그러므로 계약의 자유는 단순한 권리가 아니다. 우리 헌법이 인정하는 중요한 기본권이다. 헌법재판소도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사적 자치의 원칙이란 자신의 일을 자신의 의사로 결정하고 행하는 자유뿐만 아니라 원치 않으면 하지 않을 자유이고, 우리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되는 일반적 행동자유권의 하나이다. 이런 사적 자치의 원칙은 법률행위의 영역에서는 계약자유의 원칙으로 나타난다. (헌법재판소 2003. 5. 15. 2001헌바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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