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계약의 해석

칼린츠 2019. 10. 6.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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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첫구절이다. 교과서에 꼭 실려있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님이 상징하는 것은 수도 없이 많다. 절대자, 부처, 조국, 민족, 연인, 사랑, 생명 등등. 갖다 붙이면 장땡이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한 까닭이다. 이것이 시의 묘미다. 시는 같은 말이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제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계약내용을 시처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큰일이다. 계약은 명확해야 한다. 언어가 가진 다의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걸 위해 중요한 계약을 맺는 사람들은 반드시 계약서를 쓴다. 분명하게 적어놔야 나중에 딴말을 안한다. 그러나 계약서도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말은 다르고 다르다. 같은 계약서를 놓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하에서는 계약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알아보자. 이 논의 끝에는 충격적인 결론이 있다는 것을 미리 언급해둔다. 기대하시라.

 

 

의사표시 해석방법

 

계약은 법률행위이고, 법률행위는 의사표시로 이루어진다. '계약을 어떻게 해석할 거냐'는 문제는 결국 '계약서에 담긴 의사표시를 어떻게 해석할 거냐'의 문제다.

 

의사표시는 의사+표시다. 만약 의사와 표시가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령 나는 원래 자동차를 5,000만원에 팔려고 했는데, 실수로 0을 하나 덜 써서 자동차를 500만원에 판매한다라고 계약서에 써버렸다. 이 계약은 자동차를 5,000만원에 팔기로 하는 계약일까, 아니면 500만원에 팔기로 하는 계약일까?

 

두 가지 해석방법이 있을 게다. 내가 진짜 의도했던 것을 강조하여 5,000만원에 팔기로 했다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걸 자연적 해석방법이라 한다. 반면 내가 표시한 대로해석하여 500만원에 팔기로 했다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걸 규범적 해석방법이라 한다.

 

두 해석방법을 각각 언제 써먹어야 할까? 내가 5,000만원에 팔기로 의도했고, 상대방도 그와 같이 알아들었다면, 계약서에 뭐라고 적혀있든, 두 사람이 의도한 대로 계약내용을 확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때는 자연적 해석을 해야하는 것이다.[각주:1] 

 

대표적인 예로 고래고기 사건이 있다. 독일에서 1920년 선고된 유명한 판결내용이다. AB가 고래고기를 사고팔면서 계약서에 상어고기를 매매한다라고 잘못 적었다. 독일 제국법원은 계약서 문구를 무시하고 매매 물건은 고래고기라고 판단했다. 당사자가 진짜 의도했던 내용을 존중한 것이다.[각주:2]

 

이런 독일 제국법원의 판결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민법의 대원칙은 사적자치다. 가급적 계약을 맺은 당사자들의 진짜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그들이 계약을 통해 진정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것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상어고기를 매매한다고 잘못 적었으나, “고래고기를 매매한다고 으레 알고 있었다. 고래고기를 사고파는 것이 계약내용이라고 보더라도 누구하나 불이익 보지 않는다. 여기서 나온 유명한 말이 있다. “잘못된 표시는 해가 되지 않는다(falsa demonstratio non nocet).” 그렇다. 잘못된 표시는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자.

 

우리 대법원도 자연적 해석을 활용한 적이 있다. AB312번지 땅을 사고팔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웬걸? 두 사람은 계약서에 "313번지를 매매한다"고 잘못 적었다. 대법원은 계약서에 기재한 312번지 토지가 아니라 실제 매매하기로 합의한 313번지 토지가 매매목적물이다.”라고 판결했다.[각주:3]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한 것이다.

 

그러나 의사표시를 한 사람이 의도했던 내용과 상대방이 받아들인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이때는 잘못된 표시가 남을 해치기 시작한다. 예컨대 내가 당신에게 <민법책>20,000원에 팔려고 했는데, 실수로 청약서에 “2,000원에 팔겠다고 적었다. 당신은 청약서에 적혀있는대로 그저 2,000원에 이 책을 파는 줄 알고 옳다구나!’ 싶어 승낙했다. 그런데 내가 느닷없이 자연적 해석을 들이밀며 내 진짜 의도는 20,000원에 파는 것이었다. 2만원을 내놓아라라고 한다. 당신, 기분이 좋겠는가?

 

의사표시를 하는 사람도 자신의 의도가 상대에게 잘 전달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의 의사를 개떡같이 표시해놓고, 상대보고 찰떡같이 알아들으라고 할 수는 없다. 표시를 잘못해놓고 무조건 자기의 진짜 의도만 고집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건 아무리봐도 자기결정권의 범위를 벗어난다. 따라서 의사표시를 한 사람이 의도한 내용과 상대방이 이해한 내용이 다르다면 규범적 해석을 해야한다. 이때는 계약서에 표시된 내용을 객관적으로 해석하여 일반인이라면 어떻게 이해할지를 기준으로 의사표시 내용을 확정한다. 계약서에 “<민법사례연습>20,000원에 판다고 적혀있다면 그 문구 그대로 그 책을 20,000원에 팔기로 합의하였다고 해석해야 한다. [각주:4]

 

<판례> 대법원 1969. 7. 8. 선고 69563 판결
채권자 A가 채무자 B에게서 36만원을 수령하면서 실제는 더 받을 금전이 있는데도 36만원이라도 우선 받기 위해 영수증에 총완결이라고 써주었다. 이 경우 그것으로 모든 결제가 끝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 실무에서

 

민법의 대원칙은 사적자치다.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민법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자연적 해석이야말로 원칙적인 해석방법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 자연적 해석을 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당연하다. 자연적 해석이 가능하려면 두 당사자가 계약 내용에 다툼없이 똑같이 해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소송을 할 이유가 없다.

 

소송을 했다는 건 두 사람이 계약 내용에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쟤는 저렇게 해석하니, 판사님이 제대로 해석해달라는 거다. 따라서 재판에서는 오히려 규범적 해석이 원칙이다. 판례 역시 자연적 해석보다 규범적 해석을 강조한다. 가령 대법원 1992. 5. 26 선고 91다35571 판결은 아래와 같이 설시한다.

 

대법원 1992. 5. 26 선고 91다35571 판결
법률행위의 해석은 당사자가 그 표시행위에 부여한 객관적인 의미를 명백하게 확정하는 것으로서 당사자가 표시한 문언에 의하여 그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는 그 문언의 내용과 그 법률행위가 이루어진 동기 및 경위, 당사자가 그 법률행위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과 진정한 의사, 거래의 관행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맞도록 논리와 경험의 법칙, 그리고 사회일반의 상식과 거래의 통념에 따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위 판결을 읽어보면 오히려 법률행위를 해석할 때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가 아니라, 객관적 의미를 명백히 확정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는 계약내용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없을 때 비로소 활용하는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규범적 해석이 원칙이다.

 

결국, 우리의 결론은 이거다. ‘계약을 맺은 두 사람이 계약 내용으로 다툰다면, 계약서에 써진 객관적 의미를 파악하여 그 내용을 확정해야 한다.' 어때? 너무 지당하고 당연한 말씀이라 오히려 당황스럽다고? 이렇게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려고 그동안 긴 지면을 할애했냐고? 너무 화를 내진 마시라. 법학이란게 원래 그렇다. 법은 사회적 규범이므로 법학이 내린 결론이 사회적 상식 수준을 벗어나긴 힘들다. 다만, 법학은 그 상식적 결론이 어째서 타당한지를 정교한 언어로 논증한다. 그 지난한 논증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에 법학의 의미가 있다.

 

  1. 대법원 2017. 2. 15. 선고 201419776 판결 [본문으로]
  2. 독일제국법원의 192068일 판결(RGZ99, 147 사건). [본문으로]
  3. 대법원 1996. 8. 20. 선고 961958119598 판결 [본문으로]
  4. 규범적 해석을 강조하는 판례로는 대법원 1994. 3. 25. 선고 93다32668 판결, 대법원 1993. 5. 27. 선고 93다4908, 4915, 4922 판결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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