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대리 ② - 표현대리, 무권대리인 책임

칼린츠 2019. 10. 20.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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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대리

 

대리권도 없는 대리인이 본인을 위해 계약을 맺어봤자, 대리가 적법하지 않다. 계약의 효력은 본인에게 미치지 않는다. 이 사실은 계약 상대방을 두렵게 만든다. 시간과 비용들여 정성스럽게 계약서를 써도, 대리인한테 대리권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한푼, 두푼짜리 계약이라면 그나마 괜찮다. 만약 당신이 10억원짜리 아파트 매매계약을 맺는다고 해보자. 약속한 장소에 본인이 아니라 대리인을 자청하는 사람이 나왔다. 당신은 선뜻 계약할 수 있을까?

 

그러니 상대방을 보호해줘야 한다. 특히 그 상대방이 대리인에게 대리권이 있다고 믿었다면 더욱 더 보호해줘야 한다. 이런 사람조차 지켜주지 않는다면 대리제도는 누구도 이용하지 않을 거다. 계약을 할 때마다 당신 말고 본인을 직접 데려오시오라고 요구할 것이다. 대리제도는 곧 멸종한다. 민법책에서나 찾을 수 있는 애물단지로 전락할 것이다. 계약 상대방을 보호하라! 여기에 대리제도의 사활이 걸려있다.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 표현대리(表現代理)가 있다. 표현대리는 대리인에게 대리권이 없는데 마치 대리권이 있는 것과 같은 외관(겉모양)이 있고, 그런 외관이 생긴 것에 본인에게도 일정한 잘못이 있다면, 마치 대리행위가 유효한 것처럼 본인이 책임지는 것이다. 표현대리가 성립하면 대리인에게 실제 대리권이 없어도 흡사 있는 것처럼 본인이 그 효력을 받는다. 본인을 희생하여 상대방과 거래안전을 지키려는 제도라고나할까.

 

표현대리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대리권 수여의 표시에 의한 표현대리이다(125).[각주:1] 본인이 대리인에게 대리권을 주지 않았는데 마치 준 것처럼 상대방에게 표시했다. 만약 상대방이 그 표시를 과실 없이 믿고 대리인과 계약을 맺었다면 표현대리가 성립한다. 본인은 그 계약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갑이 을에게 실제로는 대리권을 주지 않았는데, 병에게 줬다고 말했다. 병은 그 말을 듣고 을이 갑의 대리인인 줄로 믿고, 을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면 제125조의 표현대리가 성립한다. 갑과 병 사이에 계약은 유효하게 성립한다.

 

둘째, ‘권한을 넘은 표현대리이다(126).[각주:2] 본인이 대리인에게 대리권을 주긴 줬다. 그런데 몹쓸 대리인 놈이 그 대리권을 범위를 넘어 계약을 맺었다. 이때 상대방이 그 대리권이 넘은 부분까지 대리권이 있다고 믿을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표현대리가 성립한다. (판례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한다. 계약 내용, 대리인이 가지고 있었던 서류, 본인과 대리인의 관계 등등.[각주:3])

 

예를 들어, 갑이 을에게 1천만원을 빌려오라는 대리권을 줬다. 그런데 을이 갑을 대리하여 병한테서 2천만원을 빌리는 계약을 맺었다. 여러 사정으로 비춰보건대, 을이 2천만원까지 빌리는 계약을 맺을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하자. 이때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가 성립한다. 갑은 나중에 병에게 2천만원을 갚아야 한다. 그러니 일을 맡기려면 믿을 만한 놈에게 맡겨야 한다. 엉뚱한 놈에게 대리권을 줬다가 급기야 표현대리가 성립해 당신이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 골치아픈 일이다.

 

셋째, ‘대리권 소멸후의 표현대리이다(129). 본인이 과거 대리인에게 대리권을 준 적이 있지만 현재는 대리인에게 대리권이 없다. 그런데 대리인이 대리행위를 하고 상대방은 대리인에게 여전히 대리권이 있다고 믿었다면 표현대리가 성립한다.

 

예를 들어, 갑이 부동산 거래업무를 맡기기 위해 직원 을을 뽑고 대리권도 준 적이 있다. 현재는 갑이 을을 해고한 상태다(대리권을 준 원인이 되었던 법률관계가 끝나면 대리권도 덩달아 소멸한다). 그런데 을이 갑을 대신해 병에게서 부동산을 사는 계약을 맺었다. 만약 을에게 여전히 대리권이 있는 줄로 병이 과실 없이 믿었다면 표현대리가 성립한다. 갑은 계약을 지켜야 한다.

 

 

 

조금 헷갈리지?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퀴즈를 내보겠다. 다음의 경우 어떤 표현대리가 성립하는지 생각해보자.

 

[퀴즈] 갑이 을에게 대리권을 줬다. 자기를 대리하여 자기 아파트에 ‘저당권을 설정’하고 돈을 빌려오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 갑은 대리권 수여표시를 해지했다. 을이 못미더웠기 때문이었다. 을에게는 이제 대리권이 없다. 그러나 오지라퍼 을은 갑을 위해 병을 만났다. 엉뚱하게도 을은 갑을 대리하여 아파트를 병에게 ‘파는’ 계약을 맺었다. 병은 을에게 대리권이 있다고 과실 없이 믿었다. 이때 성립하는 표현대리는 어떤 것일까?

① 권한을 넘은 표현대리(제126조) ② 대리권 소멸 후의 표현대리(제129조)

 

친절하게도 객관식 문제다. 답은 번일까, 번일까? 골라골라.

 

사실 훼이크다!ㅋㅋ 번과 번이 모두 정답이다. 을은 대리권이 없는 상태에서 대리행위를 했다. 129조 대리권 소멸 후의 표현대리이다. 또한 을은 저당권을 설정하라는 대리권을 받았지만 아파트를 파는 계약을 맺었다. 126조 권한을 넘은 표현대리이다. 둘이 짬뽕됐다.

 

조금 더 정교하게 설명하자면, 제129조 표현대리는 기본대리권이 된다. 이걸 넘어 대리행위를 했으니 제126조의 표현대리도 성립한다. 어쨌든 표현대리가 성립했으니, 대리는 유효해진다. 갑은 병에게 아파트 매매계약에 따라 아파트 소유권을 넘겨야 한다.

 

다수 학자와 판례는 이처럼 제129조와 제126조를 중복적용하는 것을 찬성한다.[각주:4]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민법에는 표현대리가 달랑 세종류밖에 없다. 표현대리를 여러가지로 조립하여 상대방을 더욱 잘 보호할 수 있으면 좋다. 표현대리가 살아야 대리제도를 안심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무권대리인의 책임

 

제135조(상대방에 대한 무권대리인의 책임) ① 다른 자의 대리인으로서 계약을 맺은 자가 그 대리권을 증명하지 못하고 또 본인의 추인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그는 상대방의 선택에 따라 계약을 이행할 책임 또는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② 대리인으로서 계약을 맺은 자에게 대리권이 없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 또는 대리인으로서 계약을 맺은 사람이 제한능력자일 때에는 제1항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상대방을 보호하는 또 한가지 방법은 대리인에게 무권대리인 책임을 묻는 것이다. 사실 대리인이 대리권없이 대리행위를 했을 때 가장 잘못한 사람은 대리인이다. 대리인에게 혼꾸녕을 내줘야 한다. 따라서 민법 제135조가 있다. 135조는 무권대리인이 대리권 없이 계약을 맺어 계약의 효력이 본인에게 미치지 않을 때 상대방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권리를 선택하여 무권대리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이행청구권이다. 상대방이 본인과 맺으려했던 그 계약을 대리인이 대신 이행하라고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손해배상청구권이다. 상대방은 본인과 계약체결이 좌절되어 손해를 입었을 것이고, 그 손해를 대리인에게 배상해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례] 갑은 대리권도 없으면서 을의 대리인인 척 행세했다. 갑은 병에게 을의 땅을 파는 계약을 맺었다. 병은 뒤늦게 갑이 을의 대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이 맺은 계약은 을에게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 제135조에 따르면 병이 갑에게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⑴ 우선 이행청구권이다. 병은 갑에게 '을의 땅 소유권을 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 갑은 어떻게든 을이 가진 땅의 소유권을 취득하여 병에게 줘야한다. (못주면 채무불이행이 되어 손해배상해야 한다.)

⑵ 다음으론 손해배상청구권이다. 계약이 진행되었다면 병은 대금을 치르는 대신 땅 소유권을 얻는 이익을 누렸을 것이다. 병이 얻을 수 있었던 그만큼의 이익만큼 손해를 입었다. 병은 갑에게 "내가 입은 손해를 돈으로 배상해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 

 

민법 제135조 무권대리인의 책임은 대리제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와 같다. 대리행위의 효력이 본인에게 미치지 않는다. 상대방은 미친다. 본인이 추인해주지도 않는다. 표현대리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이 무권대리인에게조차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상대방이 더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 따라서 제135조는 대단히 무거운 책임이다. 대리인이 자신에게 대리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상관없다. 설령 자신이 대리권이 있다고 착각하여 대리행위를 했더라도 제135조의 책임을 지는 것이다(무과실 책임). 

 

대법원은 심지어 제3자가 위조한 문서로 사기를 당하여 내가 대리권이 있다고 믿고 대리행위를 한 것이라도 제135조의 책임을 진다고 했다.[각주:5] 어때? 무섭지? 어쩔 수 없다. 그만큼 대리제도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지키는게 중요하다. 아무나 대리인이라고 설치고 다니면 큰 일이다. 상대방이 그런 사람들을 믿다가 예기치 못하게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안전하게 본인과 거래하기만을 요구할 것이고, 이윽고 대리제도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1. 제125조(대리권수여의 표시에 의한 표현대리) 제삼자에 대하여 타인에게 대리권을 수여함을 표시한 자는 그 대리권의 범위내에서 행한 그 타인과 그 제삼자간의 법률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제삼자가 대리권없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본문으로]
  2. 제126조(권한을 넘은 표현대리) 대리인이 그 권한외의 법률행위를 한 경우에 제삼자가 그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본인은 그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본문으로]
  3. 대법원 1971. 8. 31. 선고 71다1141 판결, 대법원 1981. 6. 23. 선고 80다609 판결 등 [본문으로]
  4. 대법원 2008. 1. 31. 선고 200774713 판결 [본문으로]
  5. 대법원 2014. 2. 27. 선고 2013다213038 판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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