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계약법] 계약과 채권

칼린츠 2019. 9. 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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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법 월드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 계약이 성립했다. 계약법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당신은 정녕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말았다. 이제 여러분 앞에 계약관계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대체 어쩌자고 이 문을 열었단 말인가. 낯선 용어가 마구 쏟아질 것이다. 복잡한 사례문제도 여러분을 괴롭힐 것이다. 이 문을 괜히 열었나 싶을 때도 있을 게다. 너무 쉽게 포기하진 말자. 민법은 조금만 정신적 에너지를 들이면 꽤 큰 정신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학문이다. 처음만 어려울 뿐이다. 민법의 문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하면 어느샌가 민법의 매력에 흠뻑 빠질 것이다. 그 맛이 어느정도인지 며느리도 몰러. 깨물면 점점 녹아든 스트로베리 그 맛이다. 

 

 

 

채권, 채무, 급부

 

Pacta sunt servanda(계약은 지켜져야 한다). 계약을 맺은 사람은 계약이 정한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예컨대 A와 B가 다음과 같은 계약을 맺었다. 

 

<매매계약서> 
1. 매도인 A는 B에게 2018. 9. 10.까지 <민법교과서>를 인도한다. 
2. 매수인 B는 A에게 2018. 9. 10.까지 대금 1만원을 지급한다. 


위 계약이 정한 대로 A와 B는 권리를 얻고, 의무를 진다. 이제 A는 B에게 "민법교과서를 인도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B는 A에게 "대금 1만원을 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한다.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이다. 각각의 권리에 대응해서 A와 B는 의무도 진다. A는 B에게 대금 1만원을 줘야할 의무를, B는 A에게 민법교과서를 인도해야하는 의무를 진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채권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행위를 해야하는 의무가 채무이다. 채권을 가진 권리자는 채권자라고, 채무를 지는 의무자를 채무자라 부른다. 채권자가 요구할 수 있고, 채무자가 이행해야하는 그 행위는 급부라고 부른다. 위 사례에서 AB에게 ‘1만원을 주는 행위를 요구할 수 있다. ‘1만원을 주는 행위가 급부인 것이다. 급부는 채권의 목적이다.

 

계약 내용이 채권 내용을 결정한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합의를 한다. 각양각색이다. 그에 따라 채권으로 요구할 수 있는 내용도 다르다. 예컨대 가게주인은 알바생과 고용계약을 맺고, 알바생에게 "일을 하세요"라고 청구할 수 있는 채권을 가진다. 세입자는 임대차계약을 맺고, 집주인에게 집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청구할 수 있다. 떡볶이 가게를 방문한 손님은 떡볶이 구매계약을 체결하고, 떡볶이 인도청구권이란 맛있는 권리를 얻는다

 

 

 

계약은 채권의 원천이다

 

샘물에서 물을 깃듯이, 우리는 계약에서 채권을 퍼내 행사한다. 물론 계약만이 채권을 만드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채권은 단독행위로도 법률 규정으로도 만들어진다. 채권을 만드는 법률 규정으로 사무관리(734조 이하), 부당이득(741조 이하), 불법행위(750조 이하)가 있다. 가령 당신이 길을 멀쩡이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불량배가 당신의 얼굴을 이유 없이 때렸다고 하자. 당신은 그 불량배와 계약을 맺은 적은 없다. 그러나 그 불량배에게 불법행위를 당하였다는 이유로 제750조에 근거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계약관계가 없어도 손해배상청구권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계약을 맺어야만 채권이 생기는 건 아니다. 채권은 계약관계 이외에서도 발생한다. (앞으로 '계약법' 파트에서는 계약관계에서 채권이 발생하는 경우를 다룬다. 그밖에 나머지는 다른 파트에서 설명한다.) 물론 채권 발생 원인 중에서 계약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계약은 채권을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공장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로서 계약서 내용을 검토할 일이 생긴다. 쫄지 말자. 계약은 채권채무의 집합체다. 집합이 원소로 나뉘듯이, 계약을 잘게 쪼개면 결국 채권과 채무로 나뉜다. 계약내용을 이해하려면 각 당사자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언제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 차근차근히 분석하면 된다. 가령 당신이 <태양열 발전소 투자계약서>라는 100페이지짜리 계약서를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자. 갑과 을이 각각 어떤 권리를 어떤 경우에 행사할 수 있는지 정리하다보면, 복잡해보이던 계약서의 흐름이 어느덧 눈에 들어온다.

 

 

 

채권의 사회적 기능

 

착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채권은 상대방에게 어떤 '물건'을 요구하는 권리가 아니라,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권리다. A가 B에게 "민법교과서를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채권이 있을 때를 떠올려보자. A가 B에게 정확히 원하는 것은 '민법교과서'가 아니다. B가 민법교과서를 '인도하는 행위'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채권의 대상인 급부는 어디까지나 채무자의 행위다. 채권자는 채권을 행사하여 채무자에게 어떤 일을 시킨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인류가 이렇게 발전한 까닭도 서로 협동하였기 때문이다. 사람 한명이 자동차, , 건물을 만들 수는 없다. 일상생활부터 경제활동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손이 항상 필요하다. 과거에는 이 문제를 다른 사람의 인격 자체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노예를 구입하는 것이다. 혹은 신분제를 만들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배층을 위해 일을 해야하는 운명을 지닌 집단을 정해버리는 것이다.

 

이제 노예제도, 신분제도 없다. 현대사회에서 그 빈자리를 계약이 메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계약을 맺는다. 종업원이 필요한 사람은 고용계약을, 새로운 건물을 짓고 싶은 사람은 건축도급계약을 체결한다. 그 계약에 따라 우리는 채권을 갖고 채무를 부담하며, 다른 사람에게 원하는 행동을 요청하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계약이 있고, 채권과 채무가 있다. 이것이 사회 구성원들의 협력을 법적으로 촉진한다. 결국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다.

 

법률가가 주로 하는 일은 재판과 소송이다. 변호사와 검사는 주장과 증거를 정리한다. 판사는 그 자료를 보고 판단한다. 소송과 재판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물건을 만들지도, 특별한 용역을 제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저 각자가 주장하는 내용을 정리하여 법적인 당부를 가릴 뿐이다. 얼핏 법률가가 특별히 의미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재판과 소송은 채권채무관계를 포함한 모든 법률관계들이 원활히 작동하도록 돕는다. 내가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채권이 있다고 한들, 그 채권에 강제력이 없으면 써먹을 수 없다. 상대방은 '흥' 콧방귀 뀌면 그만이다. 재판과 소송은 규칙을 제대로 작동하게 만든다. 채무자가 그 의무대로 일하게 만든다. 이로써 사회적 협력이 촉진된다. 혈관이 튼튼해야 몸 구석구석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다. 법률가는 혈관처럼 이어진 채권ㆍ채무관계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사회 구석구석에 재화와 용역이 공급하도록 한다. 이것이 비경제적인 재판과 소송이 가진 경제성이다.

 

 

 

채권자평등의 원칙

 

채권자는 평등하다. 뭔 사회주의스러운 말이냐고? 만국의 채권자여, 단결이라도 할까? 이른바 채권자 평등의 원칙은 채권의 본질에서 나온다. 소유권과 같은 물권은 물건을 직접 지배하는 권리다. 같은 하늘 아래 주군은 둘일 수 없듯이, 하나의 물건을 소유하는 사람은 두 명일 수 없다(소유지분을 나누어 갖는 것 말고, 물건 자체를 두명이 동시에 소유할 수 없다는 소리다). 물권은 배타적인 권리기 때문이다. 

 

한 노트북을 두고, A가 "내가 소유자다"라고 주장하고, B도 "내가 소유자다"라고 주장하면,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다. 진짜 노트북 주인은 한명일 수밖에 없다. A와 B는 서로 증거를 제시하며 실제 노트북 주인이 누군지를 밝혀내야 한다. 

 

반면, 채권은 채무자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그러니 똑같은 내용의 채권이라도 서로 다른 사람이 동시에 가질 수는 있다. 

 

가령 AB에게 주택을 파는 매매계약을 맺고, 또다시 C에게 같은 주택을 파는 매매계약을 맺었다고 하자. BA에게 주택의 소유권이전등기절차를 이행하라는 청구권을 갖고, CA에게 마찬가지의 청구권을 갖는다. B의 채권과 C의 채권은 별개로 성립하고, 둘 사이에 아무런 우열도 없다. A는 둘 중 마음에 드는 어느 한 사람에게 이행하면 충분하다. AC가 더 잘생겼다는 이유로 C에게 주택의 소유권이전등기절차를 이행해도 된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A가 C에게 소유권을 이전해버렸다면, B에게는 채무불이행책임을 져야 한다.

 

 

 

채권의 일생

 

사람은 태어나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늙고 이윽고 죽는다. 사람의 일생이다. 채권도 태어나서 활동하고 병들기도 하며 죽는다. 예를 들기 위해 ‘1천만원 대여금채권을 모셨다. 그 일생을 떠올려보자.

 

  • 내가 당신에게 1천만원을 빌려줬다. 갚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 이제 나는 당신에게 ‘1천만원을 달라면서 이행청구를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1천만원을 제때 갚으면? 내 채권은 만족을 얻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소멸한다.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는 걸 변제라고 한다.
  • 만약 당신이 돈을 주지 않으면? 나는 대여금채권을 이행하라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승소하면 법원은 피고는 원고에게 1천만원을 지급하라는 이행판결을 내려준다. 이행판결이란 “~을 이행하라는 식의 판결을 말한다.
  • 이 판결이 났는데도 당신이 돈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국가에 강제집행을 신청할 수 있다. 이제 국가가 나선다. 국가는 당신의 재산을 강제경매하는 등 강제적으로 돈을 얻은 다음 나에게 준다. 이처럼 채권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강제력으로 실현된다. 채권의 힘은 국가가 강제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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