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기초강의

[민법입문 : 물권법] 물권의 의의, 물건, 물권의 종류, 물권법정주의

칼린츠 2022. 6. 6.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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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권의 의의

 

채권은 “~을 해주세요”라며 채무자의 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가령 당신이 옷을 구입하는 계약을 맺었다면 상대방에게 “옷을 양도해주세요”라고 청구할 수 있다. 채무자는 그 청구에 따라 옷을 양도하는 '행위'를 해야할 의무를 진다. 그 채무이행을 받은 채권자는 이제 '옷'이란 물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제 채권말고, 채권자가 취득한 바로 그 '물건'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 해보자. 

 

사람은 진공에서 살지 않는다. 세상은 온갖 물건들로 가득차 있고, 사람은 이 물건을 이용하고 소비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살기 위해서는 집, 음식, 옷, 가구 등 수십가지 물건들이 필요하다. 물권은 어떤 사람이 물건을 직접 지배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다. 여기에는 점유권, 소유권, 지상권, 지역권, 전세권, 유치권, 질권, 저당권같은 권리가 있다. 소유권은 가장 이해하기 쉬운 물권의 모습이다. 당신이 이 집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이 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 집을 처분하여 교환가치를 얻든, 마음껏 사용하여 사용가치를 누리든, 그건 당신의 자유다.

 

 

 

2. 물건

 

물권의 대상은 물건이다. 민법 제98조는 물건을 “유체물 및 전기 기타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이라고 정의한다. 유체물만 물건인 것이 아니다. 전기·열·빛·소리와 같은 무형의 에너지도 관리할 수 있으면 물건이다. 세상 도처에는 물건으로 가득차 있다.

 

물건에는 부동산과 동산이 있다. 부동산이란 “토지와 그 정착물”이다.(민법 제99조 제1항). 토지, 건물은 당연히 부동산이고, 땅 위에 있는 교량, 나무 와 같은 정착물도 부동산이다. 짓다가 말아버린 건물도 건물일까?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판례는 “기둥과 지붕 그리고 주벽만이라도 이루어져야” 건물이 되었다고 본다(대법원 1977. 4. 26. 선고 76다1677 판결).

 

동산은 부동산이 아닌 모든 물건을 일컫는다(제99조 제2항). 자동차, 컴퓨터, 책상, 지폐, 관리가능한 전기 등이 포함된다. 심지어 우리집에 살고 있는 강아지 ‘뽀삐’도 동산이다. 토지나 건물이 아니니까.

 

건물과 땅은 서로 다른 부동산이다. 외국 민법 중에는 땅과 건물을 하나로 취급하는 곳이 많다. 건물은 땅의 일부이고, 땅을 소유하면 건물도 저절로 취득하는 것이다. '땅주인=건물주=진정한 갓물주'인 셈. 그러나 한국 민법은 땅과 건물을 별개의 부동산으로 다룬다. 독특하다. 그래서 땅주인과 건물주인이 달라질 수 있다. 만약 A가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 B가 아무 권한 없이 그 땅 위에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면? 땅주인 A는 B에게 건물을 철거하라고 청구할 수 있다. B는 눈물을 머금고 자기 건물을 헐어야 한다. 

 

(사실 멀쩡한 건물을 헐어버리는 건 사회적 낭비다. 판례는 이러한 사회적 낭비를 줄여보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보인다. 그중의 하나가 이른바 '관습상의 법정지상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판례는 ① 토지와 건물이 동일인의 소유에 속하였을 것, ② 매매 기타 원인으로 소유자가 달라졌을 것, ③ 토지와 건물 중 어느 한 쪽이 처분될 것, ④ 당사자 사이에 건물을 철거한다는 특약이 없을 것이란 요건을 갖추면 건물소유자는 관습상의 법정지상권을 취득한다고 본다.[각주:1] A가 땅과 건물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가 건물만을 B에게 양도했다. 둘 사이에서 건물을 철거한다는 특약을 한 바는 없다. 이 경우 B는 관습상의 법정지상권을 취득하여 그 땅을 사용할 권리를 얻는다. A는 B에게 함부로 건물을 철거청구를 할 수 없다.)

 

 

 

3. 물권의 종류

 

민법전을 펴보자. 제2편은 제185조부터 제371조까지다. 여기서 물권을 다룬다. 민법이 인정하는 물권은 딱 8개다. 점유권, 소유권, 지상권, 지역권, 전세권, 유치권, 질권, 저당권이다. 차근차근히 물권의 종류를 알아보자.

 

⑴ 첫째는 점유권이다. 이건 매우 독특한 권리다. 민법은 사람이 물건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권리를 인정해준다. 내가 도둑놈이든, 사기범이든 어쨌든 그 물건을 점유하고 있다면 그 점유가 정당한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점유권이란 권리를 갖는다. 점유는 현실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민법은 이 점유사실에 대해 ‘점유권’이란 권리를 만들어 법적인 일정한 힘을 부여한다. 점유상태를 유지하여 법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가령 선의 점유자는 점유한 물건의 과실을 수취할 권리를 가진다(제201조 제1항). 선의 점유자란 점유할 권한이 없음에도 ‘자신이 여기에서 과실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착각한 점유자를 말한다.[각주:2] 그리고 선의 점유자가 수취할 수 있다는 ‘과실’이란 단지 나무 열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법은 물건의 용법대로 얻은 산출물을 천연과실, 물건의 사용대가로 받은 돈이나 물건을 법정과실이라 부른다(제101조).[각주:3] 예컨대 돼지를 길러 얻은 새끼돼지는 천연과실이고, 땅을 빌려주고 받은 임료는 법정과실이다. 모두 과실이다. 선의 점유자라면 이를 취득할 수 있다. 

 

판례는 건물을 사용해서 얻는 이익은 그 건물의 과실에 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각주:4] 예컨대 C는 '하나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D가 자기가 C한테서 대리권을 받은 것처럼 문서를 위조해서 E를 만났고, 그를 속여 임대차계약을 맺었다. E는 자기가 진짜 대리인한테서 정상적으로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철썩같이 믿었다고 하자. E는 선의 점유자이다. 그래서 E는 그 아파트를 진짜 소유자인 C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지만, 과실수취권이 있으므로 그 아파트를 점유·사용한 이득까지 반환할 의무는 없다. 

 

점유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점유권을 침해하거나 침해할 우려가 있는 사람에게 점유보호청구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① 점유자가 누군가에게서 자신이 점유한 물건을 침탈당했다면 그 사람에게 물건의 반환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각주:5] ②점유자가 누군가에게서 점유의 방해를 받았다면 그 방해의 제거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각주:6] 점유자가 점유의 방해를 받을 염려가 있을 때에는 그 사람에게 방해의 예방이나 손해배상의 담보를 청구할 수 있다.[각주:7]

 

물론 점유권에 기한 청구와 본권에 기한 청구는 다르다. 가령 A가 점유하는 오토바이를 B가 몰래 가져갔다고 하자. A는 B에게 점유보호청구권을 행사하여 오토바이를 되찾아 올 수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B가 오토바이 소유자였다고 하자. B도 A에게 소유권에 기한 물권적 청구권을 행사하여 그 오토바이를 찾아올 수 있다(물론 A가 오토바이를 점유할 정당한 권한이 없어야 A를 상대로 물권적 청구권 행사가 가능하다. 만약 A가 오토바이 임차인이었다면 B가 A에게 물건을 돌려달라는 청구를 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소유권에 기한 소와 점유권에 기한 소는 서로 별개의 소송이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각주:8]

 

⑵ 둘째는 소유권이다. 소유권은 가장 완전한 물권이자, 모든 물권의 원천이다. 소유권을 가진 사람은 그 물건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모두 누릴 수 있다. 그 물건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있고, 그 물건을 마음껏 처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건 너무너무 중요하니까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한다. 

 

⑶ 셋째는 용익물권이다. 소유권이 물건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모두 지배할 수 있는 권리인 반면, 용익물권은 물건이 가지는 사용가치를 지배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물권이다. 민법은 지상권, 지역권, 전세권 3가지를 규정한다.

 

지상권은 다른 사람의 땅 위에 건물이나 공작물, 나무를 소유하기 위해 그 사람의 땅을 쓸 수 있는 물권이다[각주:9]. 당신이 빌딩을 짓고 싶은데 땅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땅 주인에게서 지상권을 설정받으면 된다. 이제 땅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지상권은 현실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땅주인이 땅 사용을 허락할 때 채권관계인 임대차를 이용하려고 하지, 굳이 효력이 강력한 물권인 지상권을 설정해주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각주:10]

 

지역권은 남의 땅을 자기 땅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권리다[각주:11]. 어떤 이익을 위해 이용할지는 지역권 설정계약으로 정한다. 가령 A가 자기 땅을 활용하려고 하는데 통행이 막혀있다면 옆에 있는 B가 소유한 땅에 ‘통행 목적’의 지역권을 설정할 수 있다. 이때 A가 소유하여 이익을 얻는 땅을 ‘요역지’라고, B가 소유하여 이익을 제공하는 땅을 ‘승역지’라고 부른다. 지역권이 설정되면 B는 A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승역지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누가 지역권을 설정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있나? 지역권도 현실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전세권은 전세권자가 전세금 명목으로 목돈을 지급하고 그 대가로 다른 사람의 부동산을 사용, 수익하는 권리다. 전세권자는 전세권이 소멸하였을 때 부동산을 반환하는 대신 전세금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 만약 전세권자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면 그 부동산 경매의 매각대금에서 우선변제를 받을 수 있다(제303조). C가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D와 전세권 설정계약을 맺고 등기를 하면 C는 전세권자가 된다. C는 아파트를 사용할 수 있고, 전세기간이 끝나는 등으로 전세권이 소멸하면 C는 아파트를 반환하고 이미 지급한 전세금을 되돌려받는다. 만약 집주인이 전세금을 되돌려주지 않는다면 C는 아파트를 경매붙여 버릴 수 있고, 후순위권리자나 일반채권자보다 전세금을 먼저 받아 전세보증금 반환채권에 충당할 수 있다.

 

사실 전세권은 매우 독특한 제도이다. 외국에는 없는 제도다. 전세권을 가지고 있으면 부동산을 사용, 수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세권은 분명 용익물권이다. 하지만 전세권이 소멸하면 전세권자는 전세보증금 반환채권을 갖는데 전세권은 이 채권을 담보하기 위한 담보물권이 된다. 따라서 담보물권의 성격도 부수적으로 가진다.

 

현실에서 전세권도 많이 쓰이지 않는다. 어랏? “전세계약”을 많이 하지 않냐고? 물권인 전세권을 설정하려면 등기까지 마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전세권 설정등기까지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저 당사자들이 등기 없이 계약으로 전세계약을 맺을 뿐이다. 이건 물권인 전세권이 아니다. 그저 당사자가 맺은 계약에 불과하다. 이걸 물권인 전세권과 구별하기 위해 ‘채권적 전세’로 부른다. 현실에서 보이는 전세는 대부분 채권적 전세다. 

 

물권적 전세권을 설정하려면 귀찮고 복잡하고 등기를 하는데 비용도 든다. 사람들이 이런 절차를 싫어하기 때문에 물권적 전세권을 기피하고 채권적 전세를 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이 전입신고만 해도 대항력을 인정해주고, 확정일자까지 받으면 우선변제권도 인정해주는데, 이 규정을 채권적 전세에도 적용해준다(주택임대차보호법 제12조). 따라서 이렇게 간편한 수단으로도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물권적 전세제도를 이용할 필요가 줄어드는 것이다. 다만, 주택임대차보호법,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은 주거용 건물과 상가 건물에만 적용되므로,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 다른 부동산에는 전세권을 설정할 실익이 있다.

 

⑷ 넷째는 담보물권이다. 채권담보를 위해 물건이 가지는 교환가치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다. 민법은 유치권, 질권, 저당권 3개를 두고 있다.

 

유치권은 다른 사람의 물건이나 유가증권을 점유한 사람이 그 물건이나 유가증권에 관하여 생긴 채권을 가지게 됐을 때 그 물건이나 유가증권을 유치할 수 있는 권리다.[각주:12]. A가 고객의 부탁을 받아 시계를 수선했는데, 그 고객이 돈을 안주고 있다고 하자. 시계 수리비 채권은 그 시계에 ‘관하여’ 생긴 채권이다. A는 유치권을 취득한다. 수리비를 받을 때까지 고객에게 시계를 주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고객은 돈을 주지 않고서는 그 물건을 찾아올 수 없다. 심리적 압박을 느끼고 변제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유치권은 법정 담보물권이다. 당사자가 합의해서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법에서 정한 요건이 갖춰지면 저절로 생긴다.

 

반면, 질권과 저당권은 당사자가 ‘우리 질권 또는 저당권을 설정하기로 하자’는 합의(=설정행위)를 해야 성립한다. 질권은 채권자가 채권의 담보로 채무자 또는 제3자한테서 받은 동산을 점유하고, 그 동산에서 우선변제를 받을 수 있는 권리다[각주:13]. 전당포를 떠올리면 쉽다. A는 전당포 업자 B에게 돈 300만원을 빌리면서 자신이 가진 시계를 담보로 맡겼다. 이것은 시계에 질권을 설정한 것이다. 만약 A가 약속한 때까지 돈을 안갚으면 질권자 B는 그 시계를 경매에 붙여 그 매각대금에서 우선변제받을 수 있다.[각주:14] 혹은 감정인의 평가를 받아 그 질물인 시계를 직접 채무변제에 충당해버릴 수도 있다[각주:15]. 어쨌든 채무자가 어떤 물건에 질권을 설정하려면 그 물건을 채권자에게 인도해야 한다. 이건 은근히 채무자에게 심리적 압박이 된다. A가 자신이 찬 시계를 B에게 넘겨주었을 때 행여 그 시계가 잘못되지 않을까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빨리 돈을 갚아 시계를 찾아오고 싶어질 거다. 

 

재밌게도 민법은 ‘재산권’에 대해서도 질권을 설정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마치 물건처럼 권리에도 질권 설정이 가능한 것이다. 가령 A는 B에게서 돈 500만원을 빌리고 자신이 C에게 행사할 수 있는 채권에 질권을 설정할 수 있다. 만약 A가 제때 돈을 안 갚으면 질권자 B는 그 채권을 직접 행사하여 받은 돈을 변제에 충당할 수 있다.[각주:16]. 또는 민사집행법이 정한느대로 채권의 추심, 전부 및 현금화를 할 수도 있다.[각주:17]

 

저당권은 채무자나 제3자가 채무의 담보로 제공한 부동산의 점유를 채권자가 넘겨받지 않은 채 우선변제권을 취득하는 담보물권이다. A는 B에게서 돈 1억 원을 빌리면서 자기가 가진 아파트에 저당권을 설정할 수 있다. 질권을 설정하려면 그 담보물의 점유를 질권자에게 넘겨줘야 했던 것과 다르게, 저당권을 설정할 때는 그 담보목적물을 저당권자에게 이전할 필요가 없다. A는 아파트에 저당권을 설정해도 여전히 그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당권 제도는 물건의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한다. 가장 발달한 담보제도이다. 당신이 시계에 질권을 설정했다면 당신은 채권자에게 시계를 넘겨줘야하고, 더이상 시계를 쓸 수 없다. 반면, 당신이 가진 집에 저당권을 설정하면 저당권자는 저당권으로 그 집의 교환가치를 장악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 집의 사용가치를 이용한다. 물건의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동시에 활용되는 것이다.

 

 

 

3. 물권의 효력 – 물권과 채권의 차이

 

채권은 채무자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물권은 물건을 직접·배타적으로 지배하는 권리다. 둘은 본질이 다르다. 당연히 차이가 있다.

 

⑴ 첫째, 채권은 채무자에게만 행사할 수 있는 반면, 물권은 누구에게나 주장할 수 있다. 채권은 상대적 효력만, 물권은 대세적 효력을 갖는 것이다. 가령 A가 B에게 사과 한 상자를 팔기로 약정했다고 하자. A는 B에게만 ‘사과 값을 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사과 값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사과 값을 달라는 채권은 상대권이기 때문이다. 반면, A가 사과 한 상자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그는 사과에 대한 소유권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주장할 수 있다. 생판 처음보는 사람일지라도 이 사과 상자에 손을 대면 A는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사과를 되돌려 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

 

매매는 임대차를 깨뜨린다.”는 법언이 있다. 대세적인 물권은 상대적인 채권에 우선한다. 예를 들어보자. A는 자기 소유 아파트가 있다. 그는 B와 임대차계약을 맺었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2년 동안 빌려주기로 약속했다. B는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A가 2023년쯤 C에게 덜컥 아파트 소유권을 양도했다. 이제 C가 새 소유자다. C는 B에게 “아파트에서 나가라”라고 한다. 이 경우 B는 C에게 임차권을 주장할 수 없다. B가 가진 임차권은 채권이다. 자기가 계약을 맺은 A에게만 주장할 수 있다. 반면, C가 가진 소유권은 물권이고 대세적 효력을 가진다. 세상 누구에게나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B는 아파트에서 나와야 하고 아파트를 소유권자에게 인도해야 한다. 물권은 채권에 우선한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평범한 사람들의 주거안정에 큰 위협이 된다. 그래서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전입신고를 하고 임대차계약서에 확정일자를 미리 갖추면 새로운 소유자에게도 임차권을 주장할 수 있는 대항력이 생기는 것으로 규정한다. 채권이 물권을 닮아가는 것인데, 이걸 이른바 ‘채권의 물권화 경향’이라 부른다.)

 

둘째, 같은 내용의 채권은 여러개 양립할 수 있지만, 같은 내용과 순위의 물권은 오직 하나씩만 존재할 수 있다. 물권은 배타성이 있는 것이다. 가령 A는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 그는 B에게 노트북을 주기로 약정하고, C에게도, D에게도 주기로 약정할 수 있다. 아무 문제가 없다. B, C, D 모두 A에게 노트북을 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채권을 갖는데, 모든 채권 사이에 우선순위도 없다. 모두 평등하다. A는 마음 내키는 사람 아무에게나 채무를 이행해도 된다(다만 A가 B에게 이행한다면 나머지 C, D에게 채무불이행책임을 질 뿐이다.[각주:18] 채권은 서로 사이가 좋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반면 A가 노트북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면, 동시에 B가 같은 노트북의 소유권을 가질 수는 없다. 물론 두 사람이 노트북 소유지분을 나누어 공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각자 서로 다른 별개의 지분을 갖는 것이다. 같은 지분을 겸유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저당권도 마찬가지다. A가 건물에 1순위 저당권을 설정했으면 B는 더이상 같은 건물의 1번 저당권을 취득하지 못한다. B가 설정한 저당권은 2순위 저당권이 된다. 무림의 태양은 둘이 될 수 없듯이, 한 물건에 대해 같은 물권은 둘일 수 없다.

 

이런 배타성 덕분에 물권 사이에서는 먼저 성립한 권리가 우선한다. 같은 부동산에 먼저 설정한 저당권은 1순위 저당권, 그 다음에 설정한 저당권은 2순위 저당권이 된다. 어느 저당권이든 실행하여 경매가 진행되면 그 경매대금을 순위에 따라 받아간다. 1순위가 가장 먼저, 2순위는 그 뒤 남은 것을, 3순위는 2순위까지 배당하고 남은 것이 있을 때 받아간다. 다른 종류의 물권 사이에서도 순위가 있다. A가 저당권을 설정하고, 그 뒤에 B가 지상권을 설정했다고 하자. A의 선순위 저당권을 실행하면 그 뒤에 설정한 후순위 지상권은 소멸한다. 경매절차로 땅을 산 사람은 지상권이 없는 깨끗한 부동산을 얻는다.

 

 

 

4. 물권법정주의

 

제185조(물권의 종류) 물권은 법률 또는 관습법에 의하는 외에는 임의로 창설하지 못한다.

 

채권법에서는 당사자들이 계약자유의 원칙을 누렸다. 당사자들이 마음대로 채권의 모습과 내용을 형성할 수 있었다. 민법에는 매매, 증여, 임대차 등 여러 전형계약이 있었지만 반드시 당사자들이 여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당사자가 원하는 내용으로 약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권도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창설할 수 있다고 하면 큰 혼란이 발생한다. 채권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이지만, 물권은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에 대한 물권을 취득하면 누구에게나 주장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내용의 물권을 취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권에는 ‘이 물권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이걸 공시제도라고 한다. 물권의 내용과 귀속을 알리는 일종의 광고제도인 셈이다. 공시제도라하여 거창한 것은 아니다. 부동산물권은 등기제도로 공시하고, 동산물권은 점유로 공시한다. 부동산 등기부를 발급받아 본 적이 있는가? 여기에는 그 부동산에 누가 언제 어떤 물권을 설정하였는지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부동산 등기부를 발급받아 “아, 이 부동산에는 이러저러한 물권들이 있는 거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물권은 공시제도가 필요하니까 물권은 임의로 창설할 수 없다. 물권의 종류와 내용을 미리 법률로 한정하여 규정하고, 각각 그 물권에 맞는 공시제도도 마련해 둔다. 당사자들은 법으로 정한 물권들 중에서 어떤 권리를 취득할 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마음대로 물권을 만들어내다가는 공시제도가 없는 물권이 만들어져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고 먹고 싶은 음료수를 고르듯이, 당사자도 이미 법에 규정된 물권들 중에서만 권리를 취득할 수 있다.

 

 

  1. 대법원 1988. 4. 12. 선고 87다카2404 판결, 대법원 1994. 12. 22. 선고 94다41072 판결, 대법원 1995. 7. 28. 선고 95다9075 판결 [본문으로]
  2. 판례는 단순히 착각한 것을 넘어 그와 같이 오신을 한 데 오신할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대법원 1992. 12. 24. 선고 92다2114 판결, 대법원 1995. 8. 25. 선고 94다27069 판결 등). 선의 점유자란 개념을 제한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제101조(천연과실, 법정과실) ① 물건의 용법에 의하여 수취하는 산출물은 천연과실이다. ② 물건의 사용대가로 받는 금전 기타의 물건은 법정과실로 한다. [본문으로]
  4. 대법원 1996. 1. 26. 선고 95다44290 판결 [본문으로]
  5. 제204조(점유의 회수) ①점유자가 점유의 침탈을 당한 때에는 그 물건의 반환 및 손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②전항의 청구권은 침탈자의 특별승계인에 대하여는 행사하지 못한다. 그러나 승계인이 악의인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③제1항의 청구권은 침탈을 당한 날로부터 1년내에 행사하여야 한다. [본문으로]
  6. 제205조(점유의 보유) ①점유자가 점유의 방해를 받은 때에는 그 방해의 제거 및 손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②전항의 청구권은 방해가 종료한 날로부터 1년내에 행사하여야 한다. ③공사로 인하여 점유의 방해를 받은 경우에는 공사착수후 1년을 경과하거나 그 공사가 완성한 때에는 방해의 제거를 청구하지 못한다. [본문으로]
  7. 제206조(점유의 보전) ①점유자가 점유의 방해를 받을 염려가 있는 때에는 그 방해의 예방 또는 손해배상의 담보를 청구할 수 있다. ②공사로 인하여 점유의 방해를 받을 염려가 있는 경우에는 전조제3항의 규정을 준용한다. [본문으로]
  8. 제208조(점유의 소와 본권의 소와의 관계) ①점유권에 기인한 소와 본권에 기인한 소는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②점유권에 기인한 소는 본권에 관한 이유로 재판하지 못한다. [본문으로]
  9. 민법 제279조 [본문으로]
  10. 다만, 지상권이 담보목적으로 설정되는 특수한 경우가 있는데, 이를 담보지상권이라 한다. 저당권자가 어떤 땅에 저당권을 설정하고 그 담보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지상권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당권설정자가 땅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담보가치가 유지된다. 이는 지상권 제도가 의도한 목적은 아니고 지상권을 변칙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판례는 담보지상권도 유효하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04. ㅓ3. 29. 선고 2003마1753 판결, 대법원 2008. 2. 15. 선고 2005다47205판결). [본문으로]
  11. 민법 제291조 [본문으로]
  12. 민법 제320조 제1항 [본문으로]
  13. 민법 제329조 [본문으로]
  14. 민법 제338조 제1항 [본문으로]
  15. 민법 제338조 제2항 [본문으로]
  16. 민법 제353조 2항 [본문으로]
  17. 민사집행법 제273조 제1항, 3항, 제223조 내지 250조 참조 [본문으로]
  18. 제390조(채무불이행과 손해배상)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에는 채권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없이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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